황금의 나라에 드리운 군부 통치의 그림자

■ 버마부터 지금까지, 미얀마를 바라보다 ㊤ 민주화의 역사

2022-10-10     장준영(한국외대 동남아연구소 연구교수)
일러스트 김의진(미술·20)

쉐나잉앙, 황금의 나라. 미얀마의 별칭이다. 전국 방방곡곡을 수놓은 불탑에 빠짐없이 장식된 금박이 햇빛에 비치면 황금의 자태는 배가된다. 사시사철 누렇게 익어가는 고개 숙인 벼 이삭도 황금 물결을 이룬다. 이렇게 낭만과 풍요의 서사로 가득 찬 미얀마를 단지 황금의 나라로 정의하기엔 우리가 가진 단어가 약간 부족해 보이기도 한다.

뭣하나 부족한 게 없을 것 같은 미얀마의 현대사는 내전과 군부 통치로 얼룩졌고, 군부가 실시한 폐쇄주의로 현재까지 미얀마는 국제사회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48년 1월 4일, 미얀마(당시 버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버마 국민에게 식민통치는 그들이 창달하고 계승한 전통과 문화를 강제적으로 해체당한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였다. 역사적 오욕을 자발적으로 치유하기 위해, 그리고 영국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 영연방(Commonwealth) 가입을 거절했다.

독립 미얀마에는 산재한 과제가 넘쳐났다.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국토의 복구와 경제발전이 절실했다. 그러나 정치인은 왕조시대로 돌아가 불교를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였고, 소수민족은 무장단체를 결성하고 독립을 추진했다. 독립의 주체였던 군대는 민간정부의 홀대로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1958년 10월, 군부는 민간정부를 대신하여 18개월간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1960년 군부는 소임을 마치고 병영으로 복귀하면서 절대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복귀한 민간정부는 다시 실패했다. 소수민족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불교를 국교화했고, 연방의 분열을 우려하는 군부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고 소수민족의 연방 탈퇴 건을 협의했다. 결국 1962년 3월 2일, 네윈(Ne Win) 당시 군사령관을 필두로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 초기 국민은 저항하지 않았다. 4년 전처럼 군부가 혼란한 국정을 수습하고 병영으로 복귀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부는 헌법을 정지하고 정치인을 구금하는 등 군부 독재체제를 마련하기 위한 밑 작업에 들어갔다.

사회 비판의식이 투철하고 휘발성이 강한 대학생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4개월 만이었다. 미얀마 최고의 상아탑인 양곤대 학생들이 7월 7일, 군부 퇴진을 위한 반정부 시위에 돌입했다. 군부는 미얀마 독립의 상징적 장소 중 하나인 양곤대 학생회관에서 농성 중인 학생들을 급습하여 약 20명을 사살했고, 학생회관을 폭파해버렸다. 미얀마 현대사에서 군부에 저항한 최초의 사건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네윈을 위시한 군부는 1974년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고, 공식적으로 군부체제의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권력을 움직이는 자들은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이었고, 사회 저변에는 공포정치가 뿌리를 내린 상황이었다. 네윈은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집권한 터라 국부(國父) 아웅산(Aung San)의 정치적 유산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선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는 아웅산이 주창한 사회주의를 변형한 ‘버마식사회주의’(Burmese Way to Socialism)라는 해괴망측한 이념을 들고나왔다.

아웅산은 정치제도는 민주주의, 경제구조는 사회주의를 추구하며 국가의 지속적 발전과 부의 공평한 분배를 추구했으며 무엇보다 정치와 종교는 공존할 수 없다는 견해였다. 그러나 네윈은 스스로 세속 정치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불교의 세계관이 반영된 사회주의를 추구했고 말년으로 갈수록 스스로 왕조시대 왕처럼 행동하기에 이르렀다. 정책의 지속성은 찾아볼 수 없고, 정책을 수행할 전문가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느새 미얀마는 군부라는 소수집단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는 사회가 되었고, 모든 자원은 네윈 1인을 위해 동원되었다. 한국, 인도네시아, 태국 사례에서 보듯이 통상 군부정권은 허약한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네윈은 아웅산의 꿈인 사회주의를 달성한다는 명분으로 경제발전을 등한시했고, 내전을 종식한다는 명분으로 군사 분야의 확장을 꾀했다.

네윈이 집권한 26년간 미얀마는 모든 분야에서 실패했다. 1962년 당시 아시아에서 일본, 필리핀 다음으로 부유하던 미얀마는 1987년 9월 유엔에 세계 최빈국 대우를 신청했다. 세계에서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던 농업국가는 이제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가 되었다. 저발전의 경제 상황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고, 사회 모든 분야의 수준도 하락했으며 무엇보다 군부를 제어할 사회집단은 없었다.

우리에겐 ‘8888 사태’로 알려진 민주화 운동이 1988년 3월부터 양곤대 학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74년 우 땅(U Thant) 전 유엔 사무총장의 장례식 이후 14년 만의 일이었다. 민주화운동이 최고조에 이른 8월에는 전국적으로 약 100만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산수찌(Aung San Suu Kyi)도 8월 말, 심사숙고 끝에 정치참여를 선언함으로써 단번에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전국적 시위는 군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대학생 중 일부는 여전히 사회주의혁명을 부르짖으며 철지난 이념 투쟁에 사로잡혔고, 퇴역한 고위 군 인사는 군부 퇴진이 민주화를 가져온다는 순진한 발상에 빠졌으며, 소수민족은 민주화에 힘을 보태지 않았다. 거리의 시민들도 군부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줄 것으로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군과 경찰에 무릎을 꿇고 헌화하며 도덕적이고 감정적 호소에 매달렸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이 죽거나 실종되었다. 9월 18일, 정권을 다시 접수한 군부는 민주화 운동을 사회주의자들의 불순한 행위라고 깎아내리며 혼란한 국정을 수습한 그들 자신이 국가의 영속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미얀마는 다시 철권통치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2005년 11월, 군부는 예고없이 수도를 옮겼고, 도시 건설에 부족한 예산을 국민에게 떠넘겼다. 하루아침에 물가가 치솟았지만, 국민은 거리로 나오는 대신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했다. 탁발로 생활하는 승려들이 국민의 생활고를 완화하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미얀마에서 승려는 부처의 제자이자 자식으로 승려를 해하는 것은 다음 생애를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군부에게 관용은 없었다. 거리의 승려를 가짜라고 덧씌우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2007년 8월 몬순, 국민의 피는 흠뻑 내리는 빗줄기에 씻겨 흘러갔고, 한 줌 남아 있던 군부의 도덕성은 땅에 떨어졌다.

군부는 그들이 만든 민주화 7단계 로드맵에 따라 2010년 11월 총선을 실시했다. 민주인사의 선거 참여는 거부되었고, 광활한 부정선거로 군부가 조직한 정당이 승리했다. 이듬해 3월 말, 롱지(미얀마 전통의복)로 갈아입은 군인은 이제 민간정부의 시대, 민주화의 시대가 열렸다고 주장했다. 5년간 다양한 개혁과 개방이 단행되었다. 국제사회의 지도자들이 미얀마를 방문했고, 민주주의 발전의 긴 여정에 동행하겠다는 약속도 받았다. 북한이 본받아야 할 나라가 미얀마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군부의 직접적 정치참여는 없었으나 내전 관리와 경제활동에는 기득권을 포기할 의향이 없었다.

2016년 아웅산수찌가 이끄는 민간정부가 탄생했다. 민간 통치가 부활하기까지 꼬박 54년이 걸렸다. 국민의 기대와 달리 아웅산수찌 정부의 역량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국민은 아웅산수찌를 지지하지 않으면 다시 군부통치의 시대가 온다며 그에 대한 조건 없는 지지를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