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생각대로 살아도 괜찮아”
■신년 특별 인터뷰 임영희 <양림동 소녀> 감독
오른손 장애…왼손으로 그린 낱장 그림 모아 한 편의 영화 만들어
영화 제작, 가족들과 화해의 기회 돼
트라우마 느낄 새 없이 끊임없이 고민했던 운동가로서 삶
계묘년의 해가 떠올랐다. <전대신문>이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는 학우들에게 작년 광주여성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된 <양림동 소녀>의 임영희 감독(67)의 신년 메시지를 전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주체적으로 살아가라”고 강조했다./엮은이
희망을 발견한 시간
영화 <양림동 소녀>는 진도에서 태어나 광주로 유학 온 이야기, 성인이 되어 광주5월민중항쟁(5·18)을 겪었던 이야기, 노년이 되어 장애인의 삶을 살게 된 임 감독의 이야기를 그의 내레이션으로 담고 있다.
영화 제작의 시작은 단순히 영화제 출품만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뇌졸중으로 인한 오른손 장애와 코로나19로 힘겨움이 왔던 때, 임 감독은 아들의 권유로 ‘그림책 만들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왼손으로 삐뚤빼뚤하게 그림을 그렸지만, 그에게 그림은 남다른 활동이었다. 그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림이었으면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며 “나의 이야기를 그리다 보니 재미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 장 한 장 그린 아기자기한 그림을 본 아들은 임 감독에게 5·18을 겪었던 경험과 장애인으로 사는 삶도 그려보길 제안했다. 힘든 시절을 회상해야 했기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가족들의 격려를 받아 완성할 수 있었다. 낱장의 그림이 모여 <양림동 소녀>라는 한 편의 영화가 탄생했다.
그림을 그린 과정은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는 기회이자 아버지와 화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임 감독에게 아버지는 단 한 번의 야단조차 치지 않았다. 집안을 말아먹는 행동이라며 비난할 법했지만, 오히려 따뜻한 걱정을 건네주던 아버지다. 그는 “사실 자식은 부모한테 반역자가 되지 않으면 운동하기 쉽지 않았다”며 “집안도 나로 인해 거의 망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딸의 인계를 위해 경찰서에 오던 아버지의 속이 얼마나 곪았을 거예요”라며 “곪아 터진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양림동 소녀>는 그가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줬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몸으로 할 수 있는 민주화운동도 끝났고, 새로운 나에 대한 희망이 생겼다”고 이야기했다. 폐막작에 당선된 것에 대해 임 감독은 “요즘 젊은 여성들이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궁금했다”며 “광주여성영화제 현장을 함께할 기회였고, 감독들을 만나보니 기대 이상으로 활동하고 있어 굉장히 영광스러운 마음이다”고 전했다.
진보적 여성 운동의 시작, 송백회
“홍희담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인생에 큰 자극을 주었다.”
임 감독은 중·고등학교부터 민주화운동을 겪던 시기까지 양림동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영화 제목을 <양림동 소녀>로 지은 것도 이러한 이유다. 그는 송백회 활동과 5·18을 거치며 운동가의 삶을 살아왔다. 당시 만났던 홍 선생은 임 감독에게 처음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시몬느 보봐르, 로자 룩셈부르크를 통해 사회적 평등에 관해 대화했다.
모든 활동은 해남에서 열린 농민회에서 시작됐다. 김남주, 황석영 선생 등이 농민회를 함께했고, 전국의 문화 운동 1세대가 모인 자리였다. 해남에서 시작된 자극은 자주적인 여성들이 모여 송백회 활동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여성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자각의 단계를 넘어선 사람들이 모였다”며 “새로운 여성 운동의 시각에서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1978년 11월 민청학련 관련 구속자 부인들과 각 분야의 여성들이 모여 ‘송백회’가 창립됐다. 송백회는 합법과 비합법의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합법적 활동은 양심수를 위한 옥바라지였다. 털실로 긴 양말을 떠 200켤레씩 교도소로 보냈다. 또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모임을 가져 핵, 농촌 문제 등을 공유했다. 비합법적 활동은 그룹 스터디였다. 당시 소위 ‘금서’로 여겨졌던 『전환시대의 논리』, 4·3 사건을 다룬 『순이삼촌』을 활용했다.
YWCA에서 도자기 전시회도 개최했다.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서 회비만으로 민주화운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여의찮았기 때문이다. 전시회를 위해 서울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을 판매했다. 합법적으로 진행된 행사였지만 당시 작품을 내줬던 작가들은 3~4일씩 끌려가기도 했다.
초기에는 20명으로 시작했지만, 구속자협의회 부인, 교사, 전일방직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했다. 그는 “송백회에 가입한다는 것은 위험이 동반하기에 용기가 필요했다”며 “자기 자신에게 맹세하지 않으면 운동하기 힘든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송백회 회원들과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나눔의 공동체라는 것은 정신과 경제적 공동체가 합일될 때 오래 지속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며 “그것이 송백회였고, 5·18전부터 그 중심에 홍희담 선생이 있었다”고 전했다.
역사적 책무감으로 가득했던 나날
임 감독은 송백회 활동을 이어가던 중 1980년 5월, 5·18을 맞이했다. 그는 “당시 5·18을 겪은 후 동료가 죽은 것에 대해 미안함이 있었다”며 “체제에 관한 항의를 계속해왔지만 무기력함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트라우마를 느낄 시간은 없었다. 그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며 “지금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다.
5·18을 알려야 한다는 책무감 아래 정치적 활동의 한계를 인지한 임 감독은, 문화적으로 활동을 이어가고자 했다. 송백회 간사이면서도 극단 ‘광대’ 회원이기도 한 그는 양림교회 목사를 찾아가 ‘갈릴리문화선교’를 만들 것을 요청했다.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5·18을 알렸고,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넋들을 위로하는 김종률 작곡 발표회, 님을 위한 행진곡 작업까지 이어갔다.
임 감독은 노인이 된 지금, 청년이었던 스스로를 바라보면 ‘정열적이고 투쟁적인 상’이라고 말한다. 그는 “지금보다 열정이 수십 배 강했고,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신념이 강해 누가 봐도 매몰차게 보였다”며 “나 자신을 통제하며 강렬하게 살았던 기억이다”고 말했다. 요즘은 과거보다 여유 있고, 다각화된 시선으로 유연함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청춘들이 생각하는 바에 귀 기울이고 남아있는 나날 동안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고민한다.
“시대적 삶 공감돼 자랑스러워”
임 감독에게 영화 <양림동 소녀>는 크리스마스 선물과도 같은 존재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일이자 자기만족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영화 상영 종료 시 박수를 치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곤 한다. 임 감독은 “내 그림을 통해 관객들이 각자의 과거,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며 “나의 진실성이 전달되고 엄마의 세대의 시대적 삶이 공감되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관객들이 세상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며 노력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대학 학생들에게도 “옛날에는 일하는 사람이 아름다웠지만, 요즘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 아름답다”며 “자신만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삶을 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