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이후 여성의 세계

■1662호 광장

2024-04-08     고성만 제주대학교 부교수(사회학)

“비판적 4·3 연구” 시리즈는 ‘과거청산’이나 ‘완전한 해결’로 비유되는 현실과의 불화(不和)를 꾀하고, 비판적 시각과 목소리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서 기획됐다. 2000년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된 ‘어둠에서 빛으로’의 시대가 닦아 놓은 토대 위에 서 있기는 하나, 동시에 그것의 경계와 한계를 의식하며, 구조와 체계를 문제시하고 사각(死角)을 찾아냄으로써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마냥 휩쓸리지 않도록 반작용을 꾀하려는 실천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는 ‘속삭이는 내러티브’라는 부제를 달고, 문학과 영상, 증언과 기록, 여성과 가족·친족을 테마로 작성된 다섯 편의 4·3 논문을 엮었다. △김석범의 대하소설 <화산도>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한 <<화산도>의 여성주의적 독해 : 4·3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장은애)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재일제주인 여성의 재현을 살핀 <희생자의 얼굴 너머: 4·3 다큐멘터리 영상과 재일제주인 여성>(허민석) △여성의 4·3 증언에서의 침묵을 통해 그 공백을 읽어나가는 <증언-공백으로 읽기: 여성의 기억이 말해질 때의 침묵에 대하여>(송혜림) △‘친족지의 정치’로서 학살 이후 친족집단 기록의 양상을 살핀 <학살 이후의 친족지(親族誌): 친족지(親族知)의 생성과 실천>(고성만) △부계 혈통 중심주의에서 탈구됨으로써 ‘가족관계 불일치’를 경험하는 이중 희생자로서의 ‘딸’들의 자리를 묻는 <아버지의 기록, 딸의 기억: 4·3과 딸의 가족사>(김상애) 등 여성을 행위자로 하는 4·3 이후의 세계가 각 장마다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성’은 이번 “비판적 4·3 연구”의 공통된 관심 주제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서도 두 논문이 주목할 만한데, 먼저 <<화산도>의 여성주의적 독해: 4·3에서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화산도>는 기본적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직조된 서사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부엌이’와 ‘문난설’, ‘이유원’ 같은 여성 인물에 주목함으로써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어려운 4·3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통찰해 낸다. ‘<화산도>를 경유하여 4·3과 여성에 관해 이야기할 때 새롭게 보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주류 역사의 이해(理解)와 충돌하고 어긋나며 기존의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형태로 굴절되면서 낯선 언어로 재구성되고 채워지는 여성의 자리와 그곳에서 송출되는 목소리에 주목하고 있다.

<희생자의 얼굴 너머 : 4·3 다큐멘터리 영상과 재일제주인 여성>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주요 분석 대상으로 삼아 4·3의 문화적 기억에서 재일(在日)제주인 여성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를 분석한 글이다. 글에서는 ‘4·3은 무고한 희생의 역사’라는 제도화된 기억이 재생산되는 한편, 국민국가 성립의 정당성을 되묻는 내전 및 항쟁으로서 4·3의 기억이 억압되는 구조를 밝혔다. 그러면서 4·3을 재현하는 과정에서 되풀이되는 ‘여성=희생자’ 표상이 국가주의로 수렴되는 한국의 과거사 담론의 산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궁극적으로 이 글에서는 재일제주인 여성의 표상을 거쳐 국민국가라는 중심을 탈구하는 공간론적 관점을 도입할 때, 희생자 서사로 일원화된 4·3의 기억을 갱신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여성들의 억압된 목소리와 이야기에 주목하는 필자들은 두 번째 “비판적 4·3 연구”의 부제가 ‘속삭이는 내러티브’로 붙인 의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억눌렸던 말은, 그 억압이 걷혔을 때 반동의 힘으로 크게 울릴 수 있지만, 이전부터 줄곧, 어쩌면 4·3이라는 것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부터, 속삭이는 화법을 쓸 수밖에 없었던 이들, 이를테면 가부장제 속의 여성들, 재일제주인 여성들, 법·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이야기를 속삭이듯,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닐까. 눈 밝고 귀 밝은 이 책의 독자들이 그 목소리를 알아차려 귀 기울여 주고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

학술 논문이 독자들에게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고쳐쓰기를 반복했지만, 이 책의 시야는 여전히 협소하고 분석 또한 서툴다. 다각적인 접근을 개척하는 데 독자들의 조언을 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