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
■1663호 광장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 68운동 당시 내세워졌던 슬로건이다. 기존의 정부와 사회에서 억압해왔던 것에 대한 대항으로 프랑스에서 발생한 68운동은 독일에서는 문호들과 작가들, 그리고 배우들이 낙태에 대해서 고백하고 이를 공표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독일 내에서 낙태에 대한 분위기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현재 PC주의의 배경이 되었다고도 말하는 68운동은 프랑스에서 노조 협약의 발전을 이끌어내어 현재의 프랑스의 활발한 노조 시위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히피 문화가 나타나 냉전이라는 경직 속에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불어넣었다. 그렇다면 과연 68운동은 대체 무엇일까?
1968년 프랑스에서 코뮌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반권위주의적 운동인 68운동이 발생했다. 68운동을 확산시킨 주체는 대학이었다. 대학의 청년들이 먼저 저항했던 대상은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 독일의 쿠르트 키징거 총리 등으로 대표되었던 국가의 권위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독일에서는 클라르스펠트라는 20대 여성이 쿠르트 키징거 총리를 과거 나치 부역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뺨을 가격한 사건이 있었고, 또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한 청년들이 보수적인 언론사를 습격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 68운동은 낙태, 성별, 환경 등 다양한 층위의 권위에 대항하며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을 띄었다.
하지만 우리는 68운동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68운동은 유럽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로 확산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는 그 영향력이 크지 않았고 특히 한국에서 68운동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다. 김누리 교수는 한국이 68운동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이유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베트남전의 파병을 들었다. 한국은 남베트남에 미국과 함께 전투병을 파병한 국가로, 다수의 국군을 베트남 전선에 파병하면서 다른 국가들이 베트남 전쟁에 관찰자의 입장으로 서는 동안 북베트남의 적대국으로서 교전에 임하였고, 그런 이유로 68운동의 기조 중의 하나였던 평화주의, 반전주의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둘째로 극단적 반공주의가 이유가 되었는데, 한국전쟁 이후 반공주의를 국가의 기조로 삼을 정도로 공산주의와 진보주의를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이후 미국이 닉슨 독트린을 통하여 냉전의 완화로 나아가고자 했음에도, 한국만큼은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말한다. 군부 독재 정권은 반공주의와 권위주의적 집권을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바람이 컸기에 더욱 그렇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지식인과 언론인들이 68운동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고 말한다. 당시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68운동에 대한 평가를 대체적으로 부정적으로 반응했고, 세계정세에 밝은 언론인들도 68운동의 의의에 대해서 이해하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당시 한국 지식인들에게 혁명은 섹슈얼리티와 같은 ‘정치와 상관없는 요소’와 어울릴 수 없는 것이었다. 한국의 시민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주체가 바로 이 언론과 지식인층이기에 그들의 부정적인 반응은 한국에 68운동의 바람이 불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68운동의 바람은 지금의 서구 유럽의 전반적인 풍조를 이끌어낸 큰 사회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에서 일어난 반전 시위는 제2의 베트남 전쟁 반전 시위라고 불리는데, 그 반전에 대한 열망과 전통이 68운동에서부터 발현됐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68운동은 실패한 혁명이다. 68운동은 정부를 교체하거나 냉전을 종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회 전반이 나아가야 할 바람의 방향을 트는 데는 분명히 성공하였다. 그렇다면 한국에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68운동의 영향이 있었을까? 아니면 없었을까? 만약 한국에 68운동이 일어났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는 어땠을지, 라는 의문을 남기고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