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한X이 되어야겠다”…결의에 찬 기자의 포부

■책 <전대신문 70년 역사> 리뷰

2024-06-03     문해윤 기자

신문에 ‘5·18’ ‘IMF’ 등 시대 모습 담아
1986년 제작거부 투쟁으로 편집권 독립 요구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은 인력난

2002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기자 및 학생간담회가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 언론의 역할은 무엇일까? 신문을 읽는 사람은 줄고 있고 학생들은 학내 소식을 신문으로만 접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 대학 신문인 <전대신문>이 70년 동안 존립되어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전대신문>이 학내 소식을 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기 때문일 것이다. 책 <전대신문 70년 역사>는 <전대신문>의 존재 이유와 70년간의 역사를 담고 있다. 대학과 시대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 기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고자 한다.

 

대학 기관지에서 공론장이 되기까지

“현재(2006~) <전대신문>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용어는 ‘다양성’ ‘지역사회’ ‘공론장’ 등이다.”

1장에서 우리 대학 염민호 교육학과 교수(39기)는 <전대신문>의 정체성을 크게 △초기(1954-1979) △중기(1980-2005) △현재로 구분한다. 초기의 <전대신문>은 대학 기관지, 문화지의 모습을 띄고 있다. 교수와 학생의 의사소통의 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중기에는 대학 언론의 정체성을 성찰했으며, 신문사 내부의 갈등과 대립 등의 변화를 겪었다. 현재에는 학내 현안 쟁점화를 통해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면 내용이 분석된 자료도 책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초기에는 교내 행사 및 학사 정보를 전달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중기로 갈수록 사회적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중요성이 대두되며 사회적·정치적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현재는 학생 복지와 관련한 기사를 중심으로 보도하고 있다.

1986년 4월 17일 제2학생회관 게시판에 부착된 ‘전대신문 편집자율권투쟁’을 알리는 대자보다.

조직 내의 변화도 있었다. 초기에 전임기자는 대학원생이 주류였다. 편집위원은 교수들이 담당해 편집계획에 참여하기도 했다. 중기에는 주간·편집위원과 학생기자들 사이의 편집자율권 확보 투쟁으로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이후 학생기자들의 편집권이 강화되었다. 현재는 현직교수가 주간을 맡으며 신문사 운영 총책임자 역할을 한다. 또한 학생기자들의 활동기간과 수가 줄어들어 객원기자의 활용이 증가했다.

 

시대의 흐름 속 변하지 않은 ‘수고’와 ‘인력난’

2011년 편집국에서 기사를 적는 기자들의 모습이다.

<전대신문>은 1954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변화해 왔다. 그러나 독자가 읽는 신문을 만들자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 염 교수는 “시대마다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차이는 있다”며 “그러나 최종 결과는 독자들이 읽는 <전대신문>이다”고 한다.

독자가 읽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기자들은 각고의 노력을 들인다. 최지희(55기) 전 <전대신문> 편집위원(2011~2021년)은 “<전대신문> 기자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쉽게 쓰지 않았다”며 “취재·보도 시스템과 전통을 지켜내기 위해 처절한 노력을 계속했다”고 말했다. 이어 “부족했을 수는 있지만 확언할 수 있는 한 가지는 결코 부끄러운 신문을 만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신문을 만들기 위해 매호 노력하는 기자들의 수고가 담긴 문장이다.

한편 부족한 기자 수는 고질적인 문제로 자리 잡았다. 줄어드는 예산만큼 인력난도 위협적인 문제였다. 1458호(2010년 5월 31일 발행)에서는 “편집국장 1명, 정기자 2명이 신문을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최 전 편집위원은 “2016년에는 편집국장과 수습기자 총 2명이 신문을 제작하던 시기도 있었다”며 “조직을 안정적으로 이끌 정기자가 부족한 인력난은 2010년대에 줄곧 반복됐다”고 이야기한다.

신문 제작을 위해 밤을 새운 후 편집실 한켠에서 자는 기자들의 모습. 1999년 기자 활동 사진이다.

6장 ‘사진으로 본 전대신문 70년’을 보면 밤새워 기사를 쓰다 편집실에서 자는 기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몇십 년이 지난 사진이지만 이 모습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동료 기자가 부족하다 보니 작성할 기사가 많았기 때문이다.

 

신문에는 시대가 담긴다

713호(1980년 5월 15일 자) 신문 1면이다. 1면 톱기사로는 교수·학생 1만명이 전남도청 앞 광장에 모여 개최한 시국성토대회 기사가 있다. 신문은 계엄당국에 의해 전부 소각되었다.

1980년대 광주는 격변의 시대라 칭할 수 있다. 우리 대학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목소리를 내는 학생들로 가득 찼다. 학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대학 언론의 특성상 <전대신문>은 계엄당국의 검열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1980년 5월 15일 발행 예정이었던 713호는 당국의 압력을 받아 발간되지 못하고 전부 소각되기도 했다. 이후 수습기자를 제외한 모든 기자는 당국에 의해 해임되며 지면을 채울 기자가 부족해지는 상황도 벌어진다. 당국의 검열에 의해 시국과 관련한 기사들이 임의로 삭제되기도 했다. 책에서는 1980년대를 세 시기 ‘활기’ ‘죽음과 침묵’ ‘부활’로 나누어 정리했다. 염 교수는 “1980년대 <전대신문>은 한국 민주주의 전개 과정을 고스란히 지면에 담고 있다”며 “그 과정에는 사람들의 고뇌와 저항, 도전의 흔적이 다양한 방식으로 뚜렷하게 드러난다”고 말했다.

1990년대의 <전대신문>은 학내 문제 외에도 정치·시회 이슈를 보도하는 데 힘썼다. 1998년 IMF 국제금융사태의 영향으로 나라의 경제가 흔들렸다. <전대신문>은 ‘IMF시대 지방대 취업난’(1998년 2월 24일 발행) ‘IMF 시대 달라지는 대학 풍경’(1998년 4월 14일 발행) 등 매주 신문에 IMF 관련 주제를 보도했다. <광주일보> 윤현석(48기) 정치부 부국장은 “신문에서는 양극화, 지방대 취업난 등의 문제를 많이 다뤘다”며 “90년대는 전환기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자가 지녀야 할 ‘독함’

2001년 작성된 기자 결의서다. ‘독한X가 되어야 겠다’라는 제목이 눈에 띈다.

6장의 사진을 보면 김은혜(56기) 전 교육부장이 적은 ‘독한X이 되어야 겠다’라는 제목의 결의서가 있다. 이는 앞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결심과 포부를 담은 글로, 동료 기자들이 남긴 응원 메시지도 있다. 결의서의 제목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기자들의 모습인 것 같다.

4장의 회고담에서도 ‘독한’ 기자들의 면모를 볼 수 있다. <연합뉴스> 나보배(69기) 기자는 “수강 신청하는 학기 초가 되면 대학본부에 찾아갔다”며 “학생들이 등록금을 내고도 왜 원하는 수업을 듣지 못하는지 따졌다”고 말했다. 한청흔(79기) 전 <전대신문> 편집국장(2023년)은 “지역먹거리 인터뷰에서 두부를 파느라 바쁜 사장님께 질문하려 눈치 보며 이것저것 물어봤다”며 “기어코 준비한 질문을 다 했다”고 말했다.

회고담을 읽으며 기자가 지녀야 하는 ‘독함’을 어떤 방식으로 가져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염 교수는 “학생기자들은 주요 쟁점 사안에 대해 용감하게 대처하는 특성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2012년, 여수캠퍼스 단과대학 투표 현황을 파악하고 있는 기자의 모습이다.
1989년 12월 30일 기자들의 신문 아이템 회의록이다. 독자에게 읽히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