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신문, 비판적 사고와 언로(言路) 확보해야”
■김윤수 제18대 총장(전대신문 9기)
학생기자 사표 소동으로 밤새 펑크 난 원고 쓰기도
편집국장 칼럼 ‘무적’ 만들고, 작명한 장본인
총장 재임 시 대학신문 일절 관여하지 않아
1960년대는 “각박하고 긴박”했던 시대였다. 1960년의 4·19 혁명에 이어 1960년대 말 개발 독재가 이어졌다. 한편 1952년 문을 연 우리 대학에는 일명 ‘용봉2천건아(健兒)’가 있었다. 전체 학생 수는 2천여명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고 지식을 갈망했다.
학교를 오가는 유일한 버스 한 대와 오후 6시면 황량해지던 캠퍼스, 부족한 환경에서도 1960년대의 <전남대학보>는 젊은 지성의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했다. 1968년 4월, 9기 학생기자로 <전남대학보>에 들어온 김윤수 우리 대학 전 총장에게 당시의 <전대신문>이 어떻게 운영되었고, 무엇을 보도했는지 들었다. 인터뷰는 지난 4월 21일과 22일 서면으로 진행했다. 인터뷰 전문은 책 <전대신문 70년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시의 <전대신문>은 ‘해갈되지 않은 목마름’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이 정보든 지식이든 자유든 말이다. 대학신문은 대학인들의 ‘타는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어야 한다.”
김 전 총장의 기억 속 대학 생활은 학생기자로서의 활동이 전부다. 사정상 농대에 진학해 보낸 1학년은 그에게 무미건조 그 자체였다는 그는 1학년을 마치고 2학년 봄, <전남대학보>(현 <전대신문>)에 기자로 지원했다. 김 전 총장은 “학보사에 들어가면 의미 있는 대학 생활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치른 후 <전남대학보> 9기 학생기자에 합격한 그는 1970년 8월 말 임기가 끝날 때까지 2년 4개월간 학보사 생활을 했다.
그가 수습기자로 입사했을 때 학보사에는 총 8명의 학생기자가 있었다. 그중 여학생 기자는 2명, 사진 기자는 1명이었다. 당시에는 학보사 안에 암실이 있어 흑백 필름을 직접 현상하고 인화했다. 김 전 총장은 “사진을 찍고 필름을 현상할 수 있는 기술까지 갖춘 학생이 아니면 사진 기자가 되기 어려웠다”며 “카메라는 학보사 물건 중 가장 비싼 것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타는 목마름’ 흐르던 1960년대의 전남대
김 전 총장을 통해 그려보는 1960년대 우리 대학은 지금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먼저 학내 구성원 수다. 1960년대에는 △공대 △농대 △문리대 △법대 △상대 △의과대 총 6개의 단과대가 있었지만 전체 학년을 모두 합친 학생 수가 2천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또 학내에 총 2백여명의 교수가 재직했으나 의과대를 제외하면 학내 교수의 수가 많지 않았다. 지식에 대한 열망과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던 시기였다.
1001번 버스는 캠퍼스와 가장 근접했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김 전 총장은 “학동캠퍼스와 용봉캠퍼스를 오가는 학교 버스 말고는 1001번 버스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면서도 “1001번 버스도 서방까지만 다녀서 그곳에서 학교까지 걸어와야 했다”고 전했다. 이어 “오후 6시면 캠퍼스는 황량해졌는데 마치 고스트 타운(Ghost town) 같았다”며 “1960년대 말 미국에 1년간 계셨던 한 교수님이 인터뷰에서 “미국 대학은 밤늦게까지 불이 켜져 있던데 우리는 언제쯤 그런 시대가 올는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1960년 4·19 혁명 그리고 1964년 한일협상 반대 데모까지. 그는 “젊은 지성의 타는 목마름 같은 것이 우리 대학에 늘 흐르고 있었다”며 “대학신문은 그 갈증을 해소하고자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부족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신문에서 제일 좋아하던 학생 편집장 칼럼 코너
당시에도 기자 회의는 지금과 같이 학생 편집장이 주도했다. 회의를 통해 기사 주제와 내용을 전하고, 개교 기념호나 특집호를 준비할 때는 신문 발행 2~3주 전에 기획 후 취재해서 기사를 작성했다. 김 전 총장은 “전임기자 선생님들은 원고가 다 작성되고 나면 큰 틀에서 읽어보시고 코멘트하시는 정도였고 수정하라는 직접적인 말씀은 없었다”며 “‘톤 다운(tone-down) 하면 어떻느냐’고 조언하는 것에 그쳤었다”고 말했다.
현재와 신문사 체계, 운영 방식이 비슷한 부분도 있으나 다른 점도 있다. 현재의 <전대신문>은 16면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간교수 △편집위원 △편집국장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1960년대에는 당시의 편집국장이 현 주간교수의 역할을, 전임기자는 현재 편집위원의 역할을 했고 이외에 학생 편집장을 두었다. 신문의 지면은 총 4면이었다.
신문 인쇄는 현 출판문화원인 ‘대학 출판부’에서 활판인쇄를 했다. 즉 인쇄공들이 직접 글자 하나하나 활자를 찾아서 조판 후 발행한 것이다. 가판이 나오면 교정하고, 다시 고치는 수작업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1969년 말 박광순 교수가 편집국장(현 주간교수)으로 오며 금남로 1가의 전남일보사에서 ‘고속도 윤전기’(많은 양의 인쇄물을 빠르게 인쇄하는 기계)를 사용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김 전 총장은 “최소 이틀간 수작업으로 신문을 만들던 시대가 그때 종을 쳤다”며 “수요일 오후 전남일보사로 가서 교정을 보고 나면 한나절 만에 곧바로 신문을 받아보는 경험을 했다”고 말했다. 한편 현재와 달리 그때는 ‘패널티’ 제도가 있었는데 잘못 교정하는 횟수가 잦은 학생기자는 사임해야 했었다.
그가 신문에서 제일 좋아하던 코너는 학생 편집장과 전임기자가 돌아가며 쓰던 칼럼 코너였다. 칼럼에는 학생 입장에서 본 대학 혹은 세상에 대한 내용이 실렸다. 이후 김 전 총장은 현재 편집국장 칼럼인 ‘무적’을 탄생시켰다. 그는 “‘무적’은 1975년쯤 새로 만들어졌는데 내가 만들자고 했고, 작명도 내가 했다”며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선박들이 북을 두드리며 자기의 존재를 알리며 바다를 헤쳐 나가듯 암울한 시대의 목탁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학보사 생활로 무수한 만남 체감해
함께 신문을 만들던 동료 기자와의 추억에 대해 묻자 그는 “9~11기 학생기자들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며 “졸업 후에도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동지가 되었다는 면에서 학생기자 생활은 축복이고 기쁨”이라고 답했다.
김 전 총장은 ‘콩나물’과 ‘사카린 물에 담근 생고구마’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던 때를 회상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충장로 파출소 뒷골목에 빽빽이 들어선 주막에서 저녁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말했다.
한편 펑크 난 기사를 메꾸기 위해 대체 원고를 쓰는 일은 당시에도 허다했다. 새 편집국장 교수가 오며 몇몇 학생기자는 사표를 쓰고 학보사를 나가는 일명 ‘사표 소동’이 학기에 한두 번 있었다. 본래 그들이 쓰기로 했던 기사 원고가 펑크나면 밤새 그 면을 채우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4면의 문화면은 △문예작품 △논평 △논술문과 같이 독자들의 투고로 면이 채워졌다. 그러나 원고 재고가 충분하지 않을 때는 학생기자들이 필명이나 가명을 사용해 지면을 채웠다.
우리 대학 제18대 총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도 그는 대학신문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김 전 총장은 “주간교수께 임명장을 드리며 대학본부는 대학신문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 말씀드렸었다”며 “대학신문이 무슨 말을 하든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형, 그러면 안 돼”하며 대들던 후배 기자들 덕에 내 삶이 그래도 조금은 덜 망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며 “학보사 생활은 무수한 만남을 체감하던 때”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대학신문의 역할에 대해 묻자 “존재 가치는 비판적인 접근과 비판적인 사고방식이다”고 말했다. 이어 “비판적 사고가 과학의 발전에 있어 핵심이듯 언로(言路)의 확보는 민주주의 발전의 필수다”며 “비판적 사고와 언로의 확보가 아카데미아를 보장하며 이것이 대학신문이 지켜내야 할 신념(Credo)”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