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나토스
2024 문예작품현상공모 단편소설 부문 가작
[프로이트는 에로스, 즉 삶의 본능과는 달리 죽음의 본능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파괴의 본능이라고도 불리는 이 죽음의 본능은 생물체가 무생물로 환원하려는 본능을 일컫는다. 일명 타나토스.]
매일 돌멩이가 되는 꿈을 꾼다. 무릉도원에서 복숭아 향기 가득 머금고 가끔 비가 오면 살짝 젖었다가 해가 나면 금방 마르는. 덥지도 춥지도 않은 산들바람을 온몸에 저장했다가 나 홀로 바람 내음 만끽하며 아무 의미 없이 사는 삶. 비가 오건 구름이 끼건 태풍이 덮치건 나무가 꺾이건 땅이 갈라지건 물살이 내 몸을 깨부수건 어떤 고통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삶의 의미와 무관한 삶, 석생(石生)을 꿈꾼다.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땅과 붙어있다가 살짝 불어온 바람에 떨어져서 너의 머리를 맞춘다 해도 나는 죄가 없다. 누군가 나를 집어서 너의 뒤통수를 후려친다 해도 나는 죄가 없다. 네가 나에게 걸려 넘어져서 절벽에서 떨어진다 해도 나는 죄가 없다. 돌이 지을 수 있는 죄를 지어서 네가 나에게 소리치고 욕을 한다고 해도 나는 들을 수 없을 테니 별 신경 쓰지 않을 테다. 그러면 너와 내가 화해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나는 돌멩이가 되고 싶다.
너와 다투고 벼랑 끝에 선 것은 이상하게도 나다.
내가 있을 수 있는 숲을 헤매다가 너를 만났다. 그곳에서는 밤낮 없이 잡화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코로 맡을 수 있는 모든 냄새는 마음까지 일렁였다. 아늑하고 아담한 오두막에서 우리는 평생 함께할 줄 알았다. 그런데 너는 나에게 무형의 칼을 들이밀었다. 식칼보다 두껍고 날카로웠다. 그것으로 심장을 관통당했을 때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뜨거운 심연에서 검은 폭포가 솟아났다. 붉디붉은 피는 내 눈에만 보인다. 무형으로 생긴 상처니 유혈마저 무형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더 괴롭다. 뭐가 문제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죽어갔다. 너는 네가 새긴 상처를 보지 못하는구나. 그 입으로 휘두른 그 무기가 얼마나 가혹한지 모르는 건 더 많은 상처를 남겼다. 아픔을 인정받을 수 없었으니까. 그래도 언젠가 한 번쯤은 보이지 않는 상처를 보고 내게 손 내밀어 준 이가 있다. 검은 손이었지만 그 손끝에는 선의가 있었다. 적어도 그 당시 내 눈에는 그것이 보였다. 삐뚤어진 눈인지도 모르고 보이는 걸 믿었다. 그 사내는 진짜로 칼을 들이밀었다. 그 눈에 서린 광기는 내가 이길 것이 못 됐다. 나는 내 왼팔 하나를 내어주고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다.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만으로 다행이라고 여겼지만, 아니다, 이건 불행 중 최악이다. 칼이 지나간 자리의 상처가 아물 줄 모른다. 그냥 칼자국이 아니라 팔이 절단 되었으니 고통은 당연했다. 가는 길마다 붉은 피가 나를 증명했다. 아주 중요한 것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영혼일까. 피가 영혼이었던가? 비릿하고 쇳내 풍기는 액체가 다 빠져나오는 날에 비로소 몸은 껍데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다. 어쩌면 내 영혼은 여기에 깃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몸에 힘이 빠지고 숲이 희미해진다. 신록이 가늘고 길게 늘어진다. 걷고 있긴 한 건지, 허공에 다리를 휘젓고 있는 건 아닌지,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할 수 없다. 집에 가면 상처가 금방 아물 텐데. 하루만 푹 자면 언제 그랬냔 듯이 흉터가 지고 가려움만이 남을 텐데. 내가 태어난 숲. 부모님과 함께 살던 그 오두막에서 살 때는 다리가 부러지고 또래가 휘두른 나뭇가지가 배를 관통해도 다음 날이 되면 멀쩡했다. 그곳은 나의 치유이자 안식처였다. 이제는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내가 왔던 숲으로 돌아가려 시도해 보았지만 늘 실패했다. 나는 나무를 구분할 줄 몰랐고 아는 꽃이라고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나의 숲에 있던 꽃과 나무를 잊어버렸다. 그러니 찾아가려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는지도. 그동안 지나온 족적을 의심해 본다. 그 숲은 부모님의 구역이기도 하다. 부모님은 살아계실까. 왕래가 불가능하니 알 수 없다. 그분들이 없어도 그곳은 여전히 안식처일까. 갑자기 떠난 자식을 그리워하고는 있을까. 괘씸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럼 내 숲에 돌아가도 불청객이 되겠지.
생각이 어디까지 닿았는지 희미해질 때쯤 되니 슬슬 졸음이 몰려온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 지금 눈을 감으면 내 영혼은 이 땅과 숲에서 영영 떠날 것을. 그러다 돌부리에 넘어졌다. 팔을 휘저어 본다. 아차, 난 왼팔이 없다. 없는데도 감각하고 있다. 익숙해진 아픔도 고통스러워하며 사라진 왼팔을 느끼고 있다. 드디어 병신이 된 것을 깨달으며 바닥에 얼굴을 박는다. 꼬라박는 모습이 얼마나 우스울까. 누구는 분명 나를 보며 코웃음 칠 거다. 묘하게 기분이 상한다. 목뒤에 힘을 줘서 몸을 일으켜 본다. 죽은 물고기마냥 축 늘어진다. 이제 일어날 힘이 없다. 온몸의 근육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나마 상체라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코에 맴돌던 향기 때문이었다. 익숙하고도 애틋한 꽃 내음이 일말의 삶으로 인도하는 것 같았다. 혹시 저기가 내가 왔던 숲은 아닐까, 하며 본 풍경은 창공 그뿐.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그것 말고는 없는 공허. 하체를 질질 끌고 앞으로 조금 기어가자 저 아래 광활한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따라 화사한 날씨는 꽃밭을 더 알록달록하게 물들였다. 나는 지금 무릉도원의 아주아주 위에 있다.
산들바람이 향기를 싣고 나에게로 오길 기다렸다. 장미 향인가? 더 달달한 향이 나는 것 같은데. 복숭아나무일까. 그런데 어딘가 모르게 더 향긋하다. 금목서? 남쪽 지방에만 나는 귀한 나무가 내 숲에 있었던가. 모든 신경이 저 아래를 향한다. 마치 저곳이 내 집일 것만 같아서, 곧 모든 아픔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서, 설령 아니라 해도 내가 절벽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 여차하면 이곳에서 뛰어내려서 다음 생에는 돌멩이로 태어나면 되니까. 아니지, 태어난다는 말은 잘못되었다. 이 몸뚱이가 대지에게 영양분이 되면 나는 곧 자연이 될 거다. 누군가에게 칼을 찔리지도, 그래서 피를 흘리지도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 무감각한 무생물. 나는 지금 기회 앞에 서 있다.
두 다리가 바들거린다. 하늘거리는 바람에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롭다. 이상하게도 나는 고민을 조금 한다. 머물지 떨어질지. 돌멩이가 되고 싶지만 죽는 것은 조금 두렵다. 고통을 원한 건 아니다. 염원하는 건 고통의 맞은편이다. 머릿속이 백지처럼 변하는 건 찰나였다.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등 뒤를 향했다. 팔과 목에 닭살이 돋는다. 얇은 흰 티를 사이로 뜨거운 다섯 개의 손가락이 느껴진다. 온기가 가까워진다. 손의 모습을 완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뜨겁게 닿는다. 동시에 왼쪽 손에 무언가 닿는 것을 느낀다. 감촉이 따뜻하다. 아, 등 뒤에 있는 건 손이구나. 어라, 나 왼팔은 없는데. 뜨거운 감촉이 사라진다. 곧이어 나의 세상이 꼬라 박힌다. 저 아래 있던 꽃밭은 어느새 머리 꼭대기 위에 있고 내가 서 있던 곳은 발아래 놓인다. 거대한 공허를 세로지르며 내는 바람이 거칠다. 아까 서 있던 곳이 절벽이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바람이 그칠 때쯤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새어 나왔다.
나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다.
나는 푹신할 것 같았던 얄팍한 꽃밭에 사정 없이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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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는 어디론가로 가고 있다. 배경이 엷파란 하늘이었다가 나무들로 바뀐 걸로 보아 아무래도 숲으로 향하는 것 같다.
정신이 들었을 때 눈에 들어온 풍경은 람이의 뒷모습이었다. 내 숲을 떠나기 전 함께 어울리곤 했던 소꿉친구다. 그런데 아무리 인사를 해도 람이는 나를 보지 않았다. 아는 체를 하려고 앞길을 가로막아 보려고도 했는데 움직일 수가 없다. 어딘가에 갇힌 듯이 나는 묶여있다. 어째서인지 숲에 들어오니 이동이 조금 자유로워졌다. 언제까지나 아래서 람이를 올려다볼 뿐이지만.
「이 오두막이야? 아담한데 멋있다~」
람이가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오던 남자가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누굴까. 이곳으로 오면서 람이는 이 사람을 나비라 불렀다. 글쎄, 내가 아는 나비는 아름답지만 이 나비는 징그럽다. 정돈되지 않은 눈썹, 여드름으로 울퉁불퉁한 피부를 보니 나비보다는 나방에 가까울 것 같은데. 그래도 꽃을 쫓는 건 같나.
「나비야. 나 추워. 불 피워줘.」
나무 밑동에 앉으면서 람이가 양팔을 쓰다듬는다. 람이 곁에 같이 있고 싶은데 나비가 움직이자 나도 그를 따라간다. 어느새 시야에서 람이가 사라지고 눈앞의 풍경이 그로 변한다. 그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웃는 상은 아니지만 뭐랄까, 여유 있어 보인다. 보통 이런 여유는 행복에서 온다.
순간 엄청난 고통이 덮쳐와서 자리를 피했다. 잘린 팔이 아직도 아물지 않은 건가. 내 몸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었다. 마치 내가 땅이 된 듯하다. 모든 세상을 굳어버린 채로 올려다봐야 한다.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나비의 뒤에 있다. 부위를 모르는 고통이 가셨다. 람이의 웃는 소리가 들린다. 둘은 깔깔거리고 있다. 행복해한다. 저렇게 웃어본 지가 언제지. 나를 보며 웃어준 사람이 본 지가 언제지. 불쾌한 상상을 하며 하늘을 바라본다. 노을의 연연한 빛이 구름을 포갠다. 나무의 겉을 감싼다. 손 뻗어보지만 닿지 않는다. 아름다운 풍경이 기분을 좋게 해주는 건 아니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나비라는 저 사람, 람이에게 사랑받고 있다.
나무와 하늘의 경계가 어둠으로 흐릿해진다. 그제야 움직임이 자유로워진다. 무작정 나비에게 끌려다니지 않아도 된다. 나는 람이의 곁으로 간다. 선홍빛이 람이의 얼굴과 몸에 불규칙하게 일렁인다. 그것 때문일까, 나는 람이의 앞으로는 갈 수 없었다. 가려고만 하면 온몸이 불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마지못해 물러난다. 람이의 뒷모습만 올려본다. 내가 뒤에 있는 것을 알아채길 바라면서.
람이가 웃을 때마다 허리까지 오는 갈색 머리칼이 눈치 없이 찰랑거린다.
「너 진짜 웃기다. 어떻게 저 밭에서 누워있을 생각을 해?」
「그냥 그러고 싶었어. 꽃향기가 좋잖아.」
「양귀비는 어떤 향기가 나는데? 혹시 취한 건 아니지?」
나비가 코를 훌쩍거린다. 밤바람에 담긴 꽃가루가 그의 코를 자극하는 듯하다. 그는 끓는 물을 컵라면에 붓는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매운맛이다. 그걸 람이에게 건넨다.
「글쎄. 달달한 향이 났던 것 같기도.」
취했냐는 질문은 능숙하게 무시한다.
「음~ 양귀비는 그런 향기나 나는구나. 그거 알아? 멀리서 보면 너 꼭 피 흘리고 죽어있는 것 같았어. PTSD 올 뻔.」
람이는 한참을 웃다가 진정했는데도 아직도 입꼬리가 귀에 걸려있다. 나도 외쳐본다.
저기. 저기 나도 라면 좀 줘, 람아. 하 씨 말이 안 통하네. 람아, 람이야! 나도 여기 있어. 나도 좀 봐줘. 야. 나도 달라고!
아무리 목성을 높여도 두 사람은 들은 체도 안 한다. 아니, 아니지. 사실은 입을 움직이기만 할 뿐 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분명 저 두 사람과 함께 있는데도 보기만 할 뿐 말이 나오지도,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한다. 축축하고 투명한 관에 갇힌 사람처럼 나는 꼼짝할 수 없다. 빛에 닿으면 고통을 느끼는 걸 제외하고는 몸에 감각이 없다. 왼팔이 없을 때도 왼팔을 느낄 순 있었는데 지금은 감각할 수 있는 신체가 없다. 다만 빛 너머에 존재할 뿐이다.
「다 먹었어?」
「응. 들어갈까?」
「그러자.」
람이와 나비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간다. 맞잡은 두 손이 다정해 보인다. 모닥불이 멀어져도 이 둘의 열기가 가시지 않는다. 작은 침대 위에서도 둘은 행복해 보인다. 실제로 타오르진 않았지만 두 사람은 작은 불이었다. 무형의 불. 일렁이는 빛 때문에 둘 사이에 내가 낄 수 없었다. 한 발치 멀리서만 모든 걸 지켜볼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건밤으로 몇 날 며칠을 보내도 피곤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비는 매일 같이 숲에서 먹을 것을 구해온다. 둘이 먹기에는 늘 양이 부족하다. 이해할 수 없던 건 람이의 깔깔대는 웃음은 입가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는 거다. 작은 오두막에서 먹잘 것 없이 배를 채울 듯 말 듯 하는데도. 가끔은 그 소리가 머리를 날카롭게 찔러서 두통이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어디가 머리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말은 정확하지 않다. 그냥 그 감각이 이전에 머리 부근에서 느꼈던 통증과 비슷할 뿐이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일곱 번인가 지켜보면서 알게 된 내 상태는 고작 통증만을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존재가 되어 있다. 무감각하지만 고통은 느낀다. 아이러니다.
나의 하루는 괴로움으로 가득한데, 람이와 나비는 그렇지 않다. 빌어먹을. 저 둘 사이에 나는 항상 쥐 죽은 듯 껴있다. 나도 여기 있는데. 나만 느낄 수 있다. 나만 안다 내 존재를.
언젠가 이 숲을 지나가던 어부가 이런 말로 람이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거 아쇼? 내가 이 숲에서 살인마를 봤지 뭐요. 그짝들도 조심하요.」
안 그래도 아빠가 친구한테 목이 졸려 죽은 것을 봤던 람이는 이 말을 듣고 경기를 일으키듯 했다. 그 후로는 오두막 밖으로 나가는 걸 극히 꺼려했다. 아무것도 없던 문은 이중, 삼중 잠금장치로 늘어났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람이는 창문까지 손댔다. 나무 판때기를 두 겹이나 겹쳐서 막아버리는 바람에 집 안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동굴이 되었다. 덕분에 나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람이 옆에 있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나와 람이 사이에는 언제나 나비가 있었다. 나는 오로지 그의 옆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람이를 향한 나의 위로는 거대한 벽에 막혔다.
오두막 주변에는 탱자나무를 심어 가시울타리를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안 그래도 좁은 집이 더 협소해졌다. 나비가 입구를 지나갈 때마다 나는 가시에 찔렸다. 오두막에 드나들 때마다 아픔이 쌓여갔다. 그런 내 상태도 모르고 나비는 람이를 달래려고 애를 썼다.
「내가 매일 같이 주변을 돌아다녔는데도 그런 사람은 보지 못했어.」
「지금은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몰라. 어쩌면 시체를 주변에 묻었을 수도 있어.」
「그랬을까 봐 땅에 이상한 거 없나 찾아봤는데도 아무것도 없었어.」
「깊이 묻었으면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
「이 숲은 안전해 람아.」
「살인마가 다시 올 거야.」
「그러면 내가 널 지켜줄게.」
「그랬다가 네가 죽으면 어떡해. 그럼 나 혼자 남게 될 텐데.」
「너 혼자 두지 않을게.」
「그 말은 우리 아빠도 했어.」
「난 너희 아빠와 달라. 내가 널 지킬 거야. 약속해.」
새끼 걸고 엄지 도장 찍는 얄팍한 약속을 람이는 믿는 걸까. 고작 약속한다는 말 한마디에 람이는 평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문을 걸어 잠그고 세상과 멀어지는 줄 알았다. 나비와도 멀어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둘은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장작이 활활 타올랐다. 사그라들던 불씨가 꺼졌으면 좋았을 걸. 무형의 불꽃도 빛이었다. 나는 매일 통증을 느낀다. 어디가 아픈지도 몰라서 고통을 없앨 수도 없는 답답함이 점점 쌓여갔다.
속에 차곡차곡 쌓이던 응어리진 마음이 시원하게 내려가던 날이 곧 찾아왔다. 나에게 내려온 첫 번째 구원이었다.
람이는 일상을 되찾았다. 나비를 기다렸다가 그가 가져온 재료들로 음식을 만들었다. 가끔 디저트로 먹을 열매를 따러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향긋한 냄새를 따라가면 그곳에는 항상 먹음직한 열매를 주렁주렁 매단 과일나무가 있었다. 그날은 사과를 따러 가던 날이었다. 사과나무는 양귀비밭 한 가운데에 우두커니 솟아 있었다. 람이는 그곳에서 흥건한 핏자국을 보았다고 한다. 람이의 말을 확인하러 나비는 직접 그곳에 가서 확인을 했다.
「람아, 피를 본 곳이 여기가 맞아?」
「확실해. 사과나무는 여기밖에 없어.」
늘 따뜻하던 나비의 말투가 식어갔다.
「그런데 없잖아. 30분 만에 피가 증발하는 것도 아니고,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아까는 분명히 있었어. 진짜야. 나도 왜 없어진 지 모르겠어.」
나비는 올라오는 한숨을 다시 삼키기를 반복했다. 발로 나뭇잎을 치워가며 땅을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람이를 바라본다. 어라,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와 마주친 그의 눈이 잠깐 머문 것 같았는데.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양귀비밭을 눈으로 훑는다. 납득할 만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꽃을 보고 무언가 떠오른 듯하다.
「너 혹시 약했어?」
「뭐?」
땅을 살피던 람이가 나비를 쳐다본다. 두 눈동자를 정확히 노려본다. 람이 눈에 눈물이 차오른다. 분기를 누르다 눈물로 새어 나온 거다.
「아니 그렇잖아, 람아. 넌 봤다고 하는데 와 보니 없고 또···」
「내 말을 못 믿겠다는 거네?」
한쪽 입꼬리만 잔뜩 치켜세운 실소에는 배신감이 서려 있다. 어이없다는 듯이 툭 내뱉는 숨이 람이의 얼굴을 더 일그러뜨린다.
「네 말은 믿어. 다만 네가 혹시 약에 취해서 헛것을 본 건 아닌가 싶은 거지 내 말은.」
「그 말이 그 말이잖아.」
「왜 그래, 나는 너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데,」
「차라리 못 믿겠다고 솔직하게 말을 해.」
「아 진짜아!」
나비가 짜증에 몸서리친다. 울분에 언성이 높아진다. 람이는 벙찐 표정으로 나비의 얼굴을 훑는다. 살짝 벌어진 입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하다. 나비는 한동안 말없이 짧은 머리를 털기만 하다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간다.
「믿어. 진짜로 믿어. 이제 됐지? 근데 네가 말한 그 피가 여기 없는 건 사실이야. 일단 집으로 돌아가자, 돌아가서 천천히 다시 생각해 보자.」
「날 약쟁이로 만들어 놓고 믿는다는 말 한마디로 해결하려고? 지금 네 말투, 날 이상한 애로 몰고 있어, 알아?」
순간 나비의 눈이 향하던 목적지가 공허해진다. 람이를 바라보지만 더 먼 곳을 향하고 있다. 떨림 없는 눈에는 찰나 살기가 서렸다가 고개를 떨구면서 사라졌다. 쏟아져 나오는 말을 통제하려고 입술을 연신 깨물어 보지만 날카로움은 그런다고 걸러지지 않는다.
「그만해. 내가 언제까지 네 망상에 놀아나야 해? 나도 사람이야. 이젠 나도 지친다고.」
「하, 사과를 해도 모자를 판에 지쳐? 망상? 너 같은 건 믿지 말걸. 쥐뿔도 없이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거 데려와서 재워주고 밥해주고 하니까 뭐? 내가 약을 해? 내가 고작 그딴 취급 받으려고 널 데려온 줄 알아?」
「오두막은 내가 발견했어.」
「그것만?」
람이의 역정에 공감이라도 하듯 돌풍이 사방에서 불어온다. 람이의 머리칼이 공중에서 흩날린다. 지옥에서 온 사신 같은 모습이다. 양귀비는 거친 바람에 한껏 허리를 숙인다. 꽃봉오리에 안착해 있던 나비가 힘겹게 날개를 파닥거려 봐도 성난 바람을 이길 순 없었다. 허공에 생긴 거대한 흐름을 타고 나비는 꽃밭 저 멀리 쫓겨났다.
나비는 터덕거리면서 람이의 숲을 나왔다. 그의 얼굴이 복잡해 보인다. 배신감? 슬픔? 분노? 그리움? 그도 아니면 후회? 색도 여러 색이 섞이면 검어지듯 그의 감정도 유현해진 듯하다. 정수리를 내리꽂는 햇빛은 그런 검은색에 차곡차곡 흡수되었다. 그의 이마와 목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나비는 나무 그늘 없는 황무지를 배틀거리며 걷고 있다. 손으로 심장 부근을 움켜쥔 채.
그는 괴로워 보이지만 나는 이상하게 기분이 괜찮다. 오히려 람이와 있을 때보다 지금이 더 좋다. 둘 사이에 있을 때는 시달리던 통증이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상쾌하다. 해가 하늘 가운데 떠 있는 바람에 지금은 비록 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줄어들었지만 괜찮다. 아주 가까이서 한껏 일그러진 그의 표정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입을 아무리 꼭 깨물어 봐도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이 느껴진다. 오랜만에 웃었더니 광대가 저리다. 나는 나비의 아래서 한동안 키들거렸다. 해가 기울기 시작하고 나비의 앞길에 내가 점점 길어질 때까지. 처녀 귀신의 흐느끼는 음성 같은 것이 내 귀에도 들린다. 그런데 이 소리가 나비의 귀에도 들어간 듯하다.
「작작 비웃어.」
한참을 말없이 걷던 나비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그의 눈과 정확히 마주쳤다. 나비는 나를 보고 있었다. 모든 걸 들킨 기분, 혼자인 줄 알았던 방을 누군가 염탐하고 있었던 불쾌함, 나는 웃음을 멈췄다.
「내가 보여?」
「씨발, 자꾸 따라다니는 데 모를 리가 있겠냐.」
「그럼 그동안 왜 날 모른척했어?」
「......」
「야」
나비는 말이 없다.
「야」
그가 나를 외면한다.
「야」
아무렇지 않은 듯 걸어간다.
「야!」
「너도 그랬으면서 왜 나한테 지랄이야 지랄은. 나보고 어쩌라고.」
나비는 나를 사정없이 짓밟는다. 괴성을 지른다. 자기 성에 못 이겨 온몸을 기괴하게 꼰다. 나비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저건 나방이다.
나는 생각보다 무던했다. 아무리 짓밟혀도 아프지 않았다. 람이와 있을 때 매일 같이 찾아오던 통증도 전혀 없다. 오히려 나비가 저리 화내는 것을 보니 입가에서 찬웃음이 나온다. 그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위에 선 기분이다. 이 기분을 또 들킨 걸까. 나비는 역정을 멈췄다. 그러자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래봤자, 넌 내 아래잖아.」
내가 지었던 미소가 나비에게로 옮겨갔다. 혐오스러운 냉소다.
「어두운 곳에서 평생 그렇게 살아. 항상 빛을 등진 운명으로. 누군가를 올려다보면서 자신이 바닥에 불과하다는 걸 매일 확인해. 그렇게 네 위치를 알아. 네 앞길을 막는 내가 있어야 살 수 있다는 걸 잊지 말고.」
어째서인지 나비가 이 말을 한 후로 나는 더 이상 소리 낼 수 없었다. 귀신 소리 같던 내 웃음소리도 말소리도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또 갇혔다. 또 나비를 올려다본다. 무력하다. 내가 손만 있었다면 가는 길마다 검은 돌부리가 되어 그를 넘어뜨릴 거다. 검은 돌멩이가 되어 그 위로 떨어지겠다. 그럼 그때는 적어도 끌려다니는 짓은 그만할 수 있겠지.
나비는 더 좋은 숲을 찾아 이곳저곳을 찾아 헤맸다. 아침에 눈을 뜨고 자기 전까지 직진만 했다. 사막을 만나도 직진, 평야에서도 직진, 산이 나타나도 직진, 그는 돌아가는 법을 몰랐다. 그는 이미 충분히 지쳤고 상처만 없을 뿐 성한 곳이 없었다.
그러다 소나무가 빼곡한 검은나무숲을 지날 때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인 걸 알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기 때문이다. 사파리 모자에 검은 우의를 입은 남자는 나비에게 손을 내밀었다.
「젊은 양반. 괜찮허요? 이거 이거, 몰골이 말이 아니네. 우리 집에서 잠깐 쉬었다 가지 않을라요?」
나비의 눈에 어부는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였다. 아득한 정신을 끌고 어부의 집으로 향했다. 나비는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시고는 대자로 뻗었다.
낮이 되어도 어둑한 검은 나무숲은 내가 있기에 아주 편한 곳이었다. 나비가 있는 곳이라면 그 주변 어디든 배회할 수 있었다. 나는 마당에 나와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어부가 말을 걸어왔다.
「거기 갇혀있느라 참 답답하겄쇼이.」
내가 보이나요? 나는 입을 뻥긋해 본다. 아까처럼 목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어부는 고개를 끄덕인다.
「예~ 이래 봬도 내가 어부 아니겠쇼.」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물고기 잡는 어부인 줄 아는데 주변이 온통 숲인디 물고기가 어딨겄쇼이. 계곡도 읎고. 나는 물고기가 아니라 그림자를 잡아 올리는 사람이오. 쉽게 말해서 낚싯대로 물고기 낚아 올리듯 그림자도 건진다 이 말이여.」
어린양을 구원하려 신이 어부를 보내신 걸까. 아님 이 자가 신인 걸까. 뭐가 됐건 이건 구원이다. 올려다본 그의 뒤에는 후광이 비친다. 그 모습이 마치 검은 소나무들 같다. 이곳 검은 나무숲은 안으로는 빛이 들어오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빼곡한 나무들이 밖에서 들어오는 빛을 막고 있다. 덕분에 사방이 역광이다. 그래서 이곳 나무들은 모두 후광을 가졌다. 지금 이 어부도 그렇다.
「에고, 목소리가 안 나오는 것 보니 저 젊은 양반이 모질게 대했고만. 인정받지 못하는 그림자는 사라지는 법이지. 걱정 마쇼이. 내가 도와주려니께. 팔 한 짝만 생겨도 금방 돌아올 수 있을겨.」
장작을 패던 어부는 들고 있던 도끼를 내려놓는다. 나무 밑동에 앉아 공구통을 이리저리 뒤적거린다. 그의 손이 까맣다. 사람 손이 저렇게 까맣게 물들 수가 있을까. 공구통에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주방으로 간다. 그리고 각종 냄비가 뒤죽박죽 쌓여있는 곳에서 칼 한 자루를 꺼낸다. 짧고 얇은 삼각형 모양의 날을 지닌 가라스키다. 그는 미리 물에 담궈 논 숫돌을 꺼내서 고정한다. 눈으로 칼을 훑는다. 칼날이 밖을 보게 두고 칼을 갈기 시작한다. 규칙적인 쇳소리가 주변 공기에 물든다. 집중한 어부의 얼굴은 아무런 감정도 미동도 없다. 나무토막 같다. 그의 모든 에너지가 두 팔을 거쳐 날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나비의 눈꺼풀이 움찔거린다. 뇌를 건드리는 소리가 그의 미간에 주름을 만든다. 그가 침대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킨다. 고요한 정적이 오히려 그를 깨운다. 정신이 다 들 적에 그는 어부의 후광을 본다. 그 손에 들린 날 선 칼에서 빛이 난다. 검다. 어부가 성큼성큼 다가간다. 순간 겁에 질린 나비는 침대에서 내려오려다 두 다리가 풀린다. 체중을 그대로 실은 채 무릎을 바닥에 찧는다. 그 짧은 사이에 상황 파악이 끝난 듯하다. 그는 발발 떨리는 손을 마구 비빈다. 사,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제가 다 잘못 했어요. 목숨만은 제발 살려주세요.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입 밖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나온다. 나비는 고작 칼 하나에 굴복했다.
「내 집에 왔으니 입장료를 내야 쓰겄어. 팔 하나 어떠쇼이?」
「예···?」
「싫으면 다른 선택지도 있쇼. 다리는 어떠쇼이?」
「아···아···.」
어느새 나비의 볼따구니는 눈물범벅이다. 람이에게 내쳐질 때보다 더 얼굴이 일그러져 있다. 다만 그때는 여러 색 섞인 검은 감정이라면 지금은 하나의 원색이다. 공포. 그뿐이다. 아까 나를 내려다보는 승자의 얼굴은 사라졌다. 그는 졌고, 지고 있고, 앞으로도 질 거다.
어부의 커다란 휘두름에 뜨겁고 붉은 것이 사방으로 튄다. 그 뒤로는 후두둑 떨어지더니 과즙처럼 뿜어져 나온다. 어부의 손이 검붉게 물든다. 붉은색이 겹겹이 쌓이니 칠흑이다. 나비의 피가 한데 모이고 모여서 검어진다. 암암한 액체가 바닥에 스며든다. 길다란 형태가 형성된다. 나의 오른팔이 생긴다. 아, 팔이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지. 신의 선물을 이리저리 만끽해 본다.
나비가 비척걸음으로 숲에서 달아나면서 나는 늘 그렇듯 그에게 끌려갔다. 그 순간에도 들뜬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고 도움을 받았으며 팔도 생겼다. 저렇게 친절한 사람도 있었다. 선의를 베푸는 자가 존재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나비를 따라갔다.
나는 나비가 어디까지 가는 지 궁금했다. 피는 영혼과도 같아서 어느 정도 빠져나가면 몸을 가눌 수 없다. 그때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사실은 그가 고통을 오래 느꼈으면 했다. 더 아파져라. 괴로워져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너도 한 번 느껴 봐.
그러다 나비의 생각과 고통이 희미해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손을 뻗어 나비를 넘어뜨린다. 다시 정신을 차리도록. 그래서 다시 아프도록. 새로 생긴 팔은 바깥세상에서도 존재할 수 있었다. 어디 한 번 더 넘어뜨려 볼까. 나는 아까처럼 땅 위로 검은 팔을 올려본다. 어라, 팔을 뻗어보지만 이동할 수가 없다. 그의 앞에 땅이 없다. 나비는 어딘가를 내려다보고 있다. 갑자기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나는 그의 뒤로 간다. 팔을 내민다. 더 더 더 더 길게 뻗는다. 검은 손이 햇빛을 받으니 붉게 빛난다. 다섯 손가락이 그의 등에 닿는다. 힘을 준다. 하잘것 없는 그를 있는 힘껏 민다. 그의 몸이 앞으로 쏠린다. 흰 티에는 손바닥 모양의 핏자국이 남는다. 그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번에도 그에게 끌려갈 줄 알았는데 나는 어느새 꽃밭 한가운데 있다. 이름 모를 흰색 꽃이 높게 솟아 있다. 꽃으로 둘러싸인 프레임 사이로 청명한 하늘이 보인다. 모서리에 뾰족하게 솟은 바위에서 무언가가 튕겨 나온다. 파란 바탕에 검은 점 하나 생긴다.
나의 형체가 잡힌다.
검은 점이 점점 커진다. 나비의 뒷모습이다. 매일 올려다봐야 했던 풍경. 그 허약한 등에 찍힌 유일한 내 흔적.
희끄무리한 나의 몸에 검고 긴 것이 뻗어 나온다.
꽃과 그의 거리가 한 뼘도 되지 않는다. 꽃들을 간지럽히던 바람이 그친다.
가슴 부근에서 심장박동이 느껴진다. 쿵. 쿵. 울림은 혈관을 타고 몸 구석구석으로 전염된다. 심장이 나를 증명한다.
나비가 심연에 빠진다. 꽃으로 둘러싸인 어둠이라니. 검은 연못 주변으로 빨간 물이 튀긴다. 그와 내가 하나 된다. 나는 그의 몸에 아주 딱 맞는 검은 관이다.
주변의 꽃이 물감이 번지듯 빨갛게 물든다. 이울던 꽃들이 영혼이 담긴 액체를 흡수한다. 그러자 물먹은 한지 같던 잎이 빳빳해지고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린다. 죽음에 생기가 돈다.
-
파스락거리는 발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흙냄새가 진하다. 풀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등 뒤로는 무언가가 기어가는 듯하다. 얇은 옷 때문인지 감촉이 선명하다. 향긋한 냄새가 코를 맴돈다. 재채기가 나온다. 눈꺼풀에 힘을 준다. 빛이 눈을 찌른다. 미간에 힘을 줘서 눈을 가늘게 떠본다. 갈색 머리 흩날리는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빛을 가려주니 그제야 얼굴이 보인다.
「사람이다.」
람이는 나를 알아보고는 잔소리를 따발총처럼 쏘아댔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오래 누워있었는지 일어나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팔다리가 쭉 뻗은 채로 굳어버렸다. 관절을 굽힐 때마다 녹슨 것 같이 삐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람이는 못마땅해하면서도 나를 부축해 숲으로 데려갔다. 불평불만을 입으로 줄줄 늘어놨지만, 마냥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 모습에 안심했다. 미움받고 있지 않구나. 람이의 눈치를 살피며 수시로 이 사실을 확인했다.
람이의 숲은 익숙했다. 나무의 품종, 수형, 흙냄새와 햇빛이 머무는 자리까지도. 내가 발견한 오두막도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좋았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람이가 주는 따뜻함에 마음이 풀렸다. 그건 사랑이었다. 바람을 막아주는 숲, 온기를 담은 오두막. 그리고 사람이 주는 마음. 풍요롭다는 말은 이런 걸 의미하는 듯했다.
받은 만큼 나도 주고 싶었다. 나는 요리를 할 줄 몰랐기에 식재료를 구해오는 데 집중했다. 숲에서 먹을만한 건 죄다 쓸어 담아서 람이에게 갖다주었다. 늘 부족한 양이었지만 람이는 못마땅한 내색 없이 근사한 음식을 만들었다.
숲을 돌아다니면서 가끔 람이 외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사파리 모자를 쓴 하얀 수염이 수북한 노인이었는데,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면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갔다. 수상했지만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에게 어떠한 해도 끼치지 않았으니까. 열매를 훔쳐 간다거나 나무를 베어가는 것 없이 그냥 숲을 지나가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를 쫓아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그는 오두막까지 와서는 람이에게 쓰잘데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그것 때문에 람이가 경기를 일으키고는 오두막 밖으로는 좀체 나오지 않는다. 고작 노인이 한 헛소리 때문에.
이 숲에서 살인마를 보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람이는 정신 나간 노인네의 말을 진심으로 믿는 걸까. 매일 보는 나보다 처음 본 사람의 말을. 이 숲에는 내가 있고, 매일 곳곳을 돌아다니며 숲을 감시한다. 이곳에서 내가 모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근래 들어 우리의 숲을 드나든 사람은 노인뿐이었다. 이곳에 살인마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