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와 도영 - 1

소설 연재 : 흘러갈 때는 9화

2024-09-01     김현

“글록이군.”

“사람을 죽이는 글록이죠.”

“... 모든 글록은 사람을 죽일 수 있지.”

“죽일 수 있는 것과 죽이는 것은 엄연히 다르죠.”

“... 그렇지. 맞아, 그렇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둘 중 한 명을 죽이는 글록이고요.”

“... 그건 아니야.”

“왜죠?”

“내가 자네를 죽인 뒤, 글록의 탄을 내 머리에 박아 넣는다면 우리 둘 모두를 죽이는 글록이 되겠지.”

“그렇네요.”

“똑같은 이치로 둘 중 누구도 죽일 수 없는 글록이 될 수 있고.”

“그런가요?”

“그럼 이건 그냥 글록이야. 건샵 창고에 첩첩이 쌓인 새 제품과 다르지 않은 것이지.”

“제 말이 현실이 되려면 저는 꼭 이겨야 하는군요.”

“그래, 나도 같은 상황이고.”

시계를 보았다. 한나 킴이 오기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Low-rise Sun’을 다시 본 건 반년 만이었다. 생각날 때마다 보는 영화다. 보고 싶은데 시간이 부족할 땐 오프닝 시퀀스만 떼어놓고 봤다. 몇 분 되지 않는 장면이지만, 볼 때마다 보이는 것이 달랐다. 한나 킴이 좋아한다는 카페는 자연광이 두드러지는 곳이었다. 공간 중간마다 이끼처럼 끼인 생초가 눈에 띄었다. 풀잎에 부딪힌 자연광의 녹색이 방금 본 장면을 연상시켰다. 두 인물을 밝히던 쨍한 초록빛이었다.

‘The Citylight’와 ‘Exit, 서울’ 사이 여러 인터뷰를 다시 읽었다. 마음이 요동칠 땐 텍스트 더미에 몸을 던져두는 것이 제격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흘리는 한나 킴이 텍스트 안에 있었다. 그 텍스트 사이의 시간을 달리며 그녀를 만났다. 텍스트 더미 속 사진은 마지막에 찍히는 점처럼 안정의 결말에 자리하며 나를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암스테르담 어느 카페에서 찍힌 사진. 한나 킴은 그녀가 마시는 커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와 지금의 미소가 닮았다. 옷차림만 조금 무거워진 채였다.

“도영, 오래 기다렸나요?”

“오래 기다렸죠. 십몇 년 만에 드디어 만났으니까 이 정도면 오래된 거겠죠?”

“그럼요, Margau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