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와 도영 - 0

■흘러갈 때는 11화(마지막 화)

2024-12-22     김현

와인바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길게 뻗은 바 위로 잔이 놓였다. 한나는 한쪽 손으로 얼굴을 괴고,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 시선을 느끼며 잔을 타고 흐른 와인의 눈물을 보았다. 나는 읊조리는 중이었다.

“뭐가 얹혀서 내려가지 않는 기분이에요. 여러 문제가 있는 걸 텐데, 애써 찾은 안정감을 흐트러뜨릴까 봐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하고... 나 취했나 봐. 이상한 말을 막 해.”

“나는 도영 씨가 더 취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의 눈에서 그녀가 마시는 와인에서 나는 블랙커런트 향이 피어올랐다.

“정말 취해서, 누구에게도 하지 못할 얘기를 하고, 후회하다가,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알게 되기를.”

“그 아이가 죽은 후로 점점 지쳐가요. 억지로 억지로 나아가는데, 자꾸 멈출 이유가 생겨나요. 그냥 내가 멈추고 싶은 걸지도.”

“멈추기에는 용기가 필요하죠.”

“그 용기를 내서 한 번 멈춰봤는데, 그 후로 못 걷겠어요. 지쳤다는 걸 이제 깨달은 거죠.”

나는 한 모금 마시고, 입을 다물었다. 한나는 같은 자세로 나를 보다가,

“... 신대륙 와인이 꽤 괜찮아요. 어지간한 보르도는 이겨 먹는다니까, 이게.”

한나는 잔을 들어 보였다.

“옛날에는 싸구려 취급받았는데, 역시 돈과 시간이 투입되면 안 되는 게 없나 봐요. 아, 원래도 떼루아는 좋았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너무 용기 내지 말아요. 그냥, 술기운에 맡기는 걸로, 도영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아니에요. 그냥, 엄마가 생각나서...”

“엄마요?”

“요즘 엄마가 연기를 하거든요. 학원도 다니고, 극단도 다니고...”

“어머, 불타오르는데요.”

“그게 부럽기도 하고, 밉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 말을 못 했어요. 응원한다, 축하한다, 가족이라는 게 남들이 못 해주는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는 그런 관계가 돼야 하는 건데. 만류하는 것도 아니고, 응원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멀리 도망쳐서 이러고 있죠.”

“뭐든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너무 늦은 건 아닐까요? 이미 상처받지 않았을까요?”

“아마 엄마는 알고 있을 거예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실망하기보단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딸을 걱정할 거예요.”

제비꽃밭에 누워있는 것 같았다. 꽃의 향이 뺨을 간지럽혔다.

다음 날, 두통과 함께 밀려온 메스꺼움을 아침 찬 바람으로 식히고 있을 때였다. 집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화장실을 들락거리면서 동생의 얼굴을 봤다.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를 아는 척할 수도, 그녀가 낸 소리에 놀랄 수도 없었다.

“요즘에도 그렇게 취하게 마셔? 체력 대단하다 진짜.”

“왜 왔어? 용건만 간단히. 알지?”

“너 먹으라고 아빠가 싸줬어. 요즘 아빠 요리가 제법 늘었다?”

동생은 매대에 책을 진열하는 서점 직원처럼 소파 위에 반찬통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걸 왜 저기에 꺼내는지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놀랍게도 같은 순간에 밀려온 구토감에 다시 화장실을 방문할 수밖에 없었다. 모든 걸 쏟아내고 나서는 평화가 찾아왔다. 입안을 가글하고, 물을 마셨다. 동생은 반찬통을 냉장고에 넣는 중이었다.

“여기 이렇게 넣어 놓을게. 알아서 잘 먹어.”

“고맙다. 니가 언니해라.”

“그건 됐고, 왠 와인이야? 너 와인 마셔?”

“와인은 이미 마셨고. 그건 걍 받은 거야.”

동생은 종이가방에서 병을 꺼내 보더니 되물었다.

“이런 걸 주는 사람이 언니 주변에 있다니... 예술가가 다르긴 한 건가?”

“좋은 거야? 그럼 집에 가져가서 너 마셔.”

“오! 나는 그럼 마다하지 않지.”

“엄마랑 아빠랑 나눠 마셔라.”

“그럼 시간 좀 걸리겠네... 뭐 일단 고마워. 잘 마실게.”

“뭔 일 있어?”

“일은 아니고, 아! 그걸 깜빡했네.”

동생은 소파로 휘적휘적 걸어가 가방에서 팸플릿 같은 것을 꺼냈다. 받아보니 이틀 뒤에 하는 연극의 티켓이었다. 동생은 가타부타 말 붙이지 않고, 가방과 와인을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꼭 와. 제발.”

창문이 열려있었다. 대류가 일어나 밀려든 찬 바람처럼 휙 불어간 소영이의 흔적을 보았다. 식탁 의자에 걸터앉아서 티켓을 꼭 쥐고 있었다. 막 태어나, 찬 통증을 폐에 불어넣는 중이었다.

극장의 암전은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아주 어릴 때, 엄마 손을 잡고 간 극장에서 어둠을 맞이했었다. 어둠을 위한 어둠이었다. 그런 어둠은 난생처음이었다. 공포감이 목덜미를 휘감았을 때 광명과도 같은 불빛이 다가왔다. 그 불빛은 나에게 무어라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말을 오래전에 잊었다.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아갔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있다.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암흑이 내리고, 약간의 소란함이 장내를 채우고, 알을 깨듯 우리에게로 배우들이 튀어나올 때까지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전쟁을 치르던 병사들이 무대 위에 나타났다. 그들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남자가 “각하께서는…”이라고 운을 띄우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렇게 병사들은 전투를 치렀고, 죽어갔다. 세 명의 병사가 남아 전장을 지키게 되었을 때, 지휘관은 전쟁을 마주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다 죽어야 끝나는 것인가.”

침묵만이 감돌았다. 그는 이제야 공포에 온 듯했다. 그의 불안은 관객의 조소에 이르렀다. 연출가의 의도인지, 배우의 실수인지, 모호했다. 아마추어 연극을 보는 관객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전선에 배치된 군대가 그러한 것처럼. 번뜩이는 순간들과 다소 어색해 부끄러워지는 순간들이 교차했다. 나는 자연스레 엄마를 찾았다. 연극이 고점으로 다가감에도 나는 엄마를 찾지 못했다. 느슨한 긴장 속에서 관객들은 각자의 기억을 찾아갔다.

어릴 때 주방에서 본 엄마의 눈에는 선명한 무언가가 있었다. 말굽 소리를 내는 엄마의 허벅지 옆에 서서, 가까스로 음식 냄새를 들이켰다. 저녁을 차리는 엄마는 자기 꼬리를 따라다니는 나를 귀찮게 여기는 듯했지만, 작은 나에게 음식 맛을 보여줄 때면, 가스 화구를 향한 엄마의 선명한 무언가가 나에게로 오는 듯했다.

나는 그 순간을 애정했다.

몸에 힘을 빼고 의자에 얹혀서 무대를 보았다. 낯선 여자가 무대로 뛰쳐 올라왔고, 울었다. 엄마였다. 엄마의 울음은 구전설화 속의 보물 같은 것이었다. 인간은 약점으로 이뤄져 있다. 인간은 약점을 내핵으로 하는 하나의 행성이다. 사람을 알아간다는 건 땅 아래 세상으로 뻗쳐가는 탐사이고, 탐사의 끝에 마주한 내핵으로 온몸을 내던질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랑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온몸을 비틀며 외면한 누군가의 내핵이 보인다. 그녀의 외로움이 보인다. 내핵의 열기로 나는 불탄다. 타오르는 나는 과거의 나이다.

떠나는 사람들을 마른 눈으로 무시하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타고 남은 재인 나는 힘이 없어서 일어설 수 없다. 네가 언젠가 말했지, 모든 것이 타버린 땅에는 다시 모든 것이 온다고, 가고 오는 사람들 속에서 그들이 지르밟는 땅인 나를 알게 된다고. 바람이 부는 걸까.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나갔다. 남은 건 나와 관객석을 정리하는 직원들뿐이다. 너와 속초 바다를 걸을 때, 바다의 경계에 서서 바다가 얼었다고 말하는 나에게 너는,

“속초 바다는 얼지 않아.”

확신 찬 말투에 나는 깜빡 속았다. 바다였다가, 바다가 아니었다가 하는 곳을 보고 있으면 수평선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속초 바다는 이제 영원히 얼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오면, 다시 모든 게 시작되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바람 부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