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세대에도 가치있는 역사 되길

5·18민중항쟁의 과거와 미래 좌담회

2025-05-11     글 이의진 기자, 사진 김청우 기자

“아직도 길 위의 공포 생생”
“전야제에서 연대 희망 느껴”
“교육과정에 헌법 중요성 강조”

<전대신문>이 지난 9일 신문방송사에서 ‘5·18민중항쟁의 과거와 미래’를 주제로 좌담회를 열었다. 좌담회에는 △5·18을 몸소 겪은 정미라(철학·80) 철학과 교수 △직접 겪진 않았지만 5·18 관련 행사 기획을 꾸리는 김꽃비(신문방송·09) 독립기획자 △탄핵 집회에서 5·18의 효용을 느낀 대학생 이기성(문헌정보·21)씨가 참여했다.

Q. 여러분에게 5·18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요? 처음 접한 계기나 장면을 묻고 싶습니다.

정미라(철학·80) 철학과 교수

정미라(정): 1980년에는 전남대에 갓 입학한 1학년이었다. 헬기 소리와 계엄군, 돌을 던지고 숨고 도망가던 길 위의 공포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집으로 가기 위해 학교에서 농성동까지 걸어가는 동안 모든 것을 봤다. 시민들과 군인이 대치하던 모습, 피아노를 치는 척하며 모르는 사람 집에 숨었던 기억, 길가에 늘어선 탱크까지 모두가 5·18민중항쟁(5·18)의 기억이다.

김꽃비(김): 광주에서 나고 자랐기에 어릴 적부터 소풍도 국립5·18민주묘지로 가고 비엔날레같은 예술축제들도 모두 5·18이 주제였다. 광주 사람으로서 5·18의 공통적인 교육 경험이 있다. 그러나 진짜 충격은 대학 신입생 때 처음 전야제에 참여했을 때다. 당시 신문방송학과에는 신입생이 들어오면 전야제에 꼭 데리고 가는 전통을 가진 교수님이 계셨다. 이오현 교수님이다. 금남로를 행진하며 만난 수많은 시민들의 표정과, 함께 걷고 구호를 외치는 그 순간 처음으로 연대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

이기성(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부모님이 들려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를 통해 처음 5·18을 접했다. 음악 배경으로 나오는 시민들이 곤봉으로 맞는 사진을 보며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악랄할 수 있나’ 생각했다.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Q. 5·18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김꽃비(신문방송·09) 독립기획자

: 5·18은 전공인 사회정치철학의 출발점이었다. 특히 독일 유학 후 광주로 돌아왔을 때 학생들에게 내가 겪었던 현실적인 5·18을 이야기했지만 학생들은 역사책 속 사건처럼 받아들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지금은 전남대 5·18연구소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5·18정신을 세계적으로 연구·확산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 양림동을 중심으로 문화 기획 활동을 했던 독립기획자다. 작년에는 5·18 44주년을 기념하여 청년들이 일상 공간에서 5·18을 이야기하는 공론장 ‘에브리씽, 메이, 올앳원스’를 열었다. 클럽, 독립서점, 제로웨이스트 샵 등에서 열린 이 공론장은 5·18의 연대가 단순 ‘주먹밥 정신’을 넘어 생명과 다양성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다음 세대에도 5·18을 가치있는 역사로 이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Q.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계엄령과 탄핵 등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5·18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느끼나요?

이기성(문헌정보·21)씨

: 노벨문학상 수상은 예전엔 폭동 취급을 받았던 5·18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런 변화는 저절로 된 게 아니라 많이 이들이 싸워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연대와 투쟁이 6월 항쟁, 촛불, 탄핵까지 이어졌다. 이긴 건 항상 국민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게 옳지 않다는 걸 보여준 5·18 정신이 6월 항쟁까지 이어져 민주주의를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한 아주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왜곡과 폄훼로 얼룩졌던 역사에 대한 보상 같았다. 수상 소식이 전해졌을 때 광주가 축제 분위기인 게 느껴졌다. 곧바로 12·3 비상계엄이 발표되며 광주가 비통함과 동시에 희망으로 떠올랐다. 한강 작가의 수상 소감 중 ‘광주가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가 됐다’는 말이 너무 와닿았다. 5·18이 계속 용기를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 전일빌딩245에 “파면이 온다 광주가 온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윤석열 파면 후 “지켰다 민주주의 고맙다 광주 정신”이란 현수막으로 바뀌었다. 그걸 보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헌정 질서가 위협받는 현실 속에서 5·18은 여전히 지켜야할 기준이자 힘이다. 우리 대학 5·18연구소도 지금보다 더 확대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Q. 광주에서 5·18이 역사적 사건을 넘어 어떤 의미나 역할을 갖고 있다고 보나요?

진행=이의진 편집국장

: 광주는 늘 정치적 자부심이 있는 도시다. 시민들이 스스로 방향을 선택하고 움직여온 역사가 있다. 단지 지역감정이 아닌,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으로다. 그게 바로 5·18 정신의 현대적 의미다. 시민의 자발성과 연대는 오늘날까지도 중요한 민주주의의 힘이다.

: 5·18이 단순 역사로만 남지 않고 광주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계속 전달될 수 있게 하는 노력이 뜻깊게 느껴진다. 시민 활동가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혁명의 도시 광주에서 온 활동가’라는 말을 듣는다고 한다. 이런 표현이 가끔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광주’라는 도시 이름 옆에 ‘정신’을 붙여 우리 삶으로 끌어오려는 노력을 하는 것 자체가 멋있게 느껴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 바로 어제 우리 대학에서 정청래 의원의 강연을 듣고 왔다. 윤석열 파면은 헌법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그 헌법의 바탕에 5·18 정신이 있다고 했다. 만약 5·18이 없었더라면 이번 12·3 비상계엄이 발표됐을 때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생각하게 했다. 이번 탄핵은 시민들이 직접 평화적으로 지켜낸 결과다.

Q. 5·18이 더 널리 기억되고 다음 세대와도 연결되기 위해선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고 보시나요?
: 과거 청산이 제대로 안 된 게 지금까지도 문제다. 5·18 정신은 단지 기억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맞서는 시민의식이다. 일본 도쿄의 리츠메이칸 대학의 평화박물관처럼 어릴 때부터 놀이처럼 평화와 민주주의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 단순한 역사 교육이 아니라, 미래를 준비하는 자산으로 삼아야 한다.

: 놀면서 배우는 평화라는 말에 동의한다. ‘5·18은 너무 중요한 역사고 잊지 말아야 해’라고 가르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일상에서 계속 5·18을 만나면서 이야기로서 5·18에 대해 궁금증을 만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 국립5·18민주묘지 옆 터널에서 본 ‘5·18 정신을 헌법에 수록하자’는 현수막이 생각났다. 헌법 전문에 5·18정신을 담는 건 상징이자 실천이다. 또 교육과정에서 헌법을 정식 과목으로 만들거나, 사회 교과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 좋겠다. 판결문을 다루는 수업도 의미 있을 것 같다.

Q. 서로 다른 세대의 5·18 이야기를 들으니 어땠나?
: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놀랐다. ‘5·18이 이렇게 살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감동도 받았다. 우리 세대 사이에선 요즘 젊은이들이 비정치적이라는 말들이 많다. 그러나 오늘 이야기들을 들으니 그런 생각을 반성하게 됐다.

: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 대화하는 자리가 더 많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1980년대 광주에 있진 못했지만, 당사자의 입을 통해 당시를 들은 사람은 5·18을 그저 역사의 한 줄로만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런 경험들이 청년들에게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 정말 다양한 세대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특히 1980년 세대의 체험담은 평소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기에 더 소중했다. 5·18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 시간이었다.

‘5·18민중항쟁의 과거와 미래’를 주제로 지난 9일 제1학생마루 신문방송사에서 좌담회가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