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배·수감·고문·투쟁…민주화에 바친 평생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고문 최운용 선생

2025-05-12     고민서 기자

25인 수배자 중 마지막으로 체포돼
“5·18 있기에 독재 반복될 일 없다”
5·18헌법전문수록 필요성 강조

“16일 날 홍남순 변호사가 군부 동향이 심상치 않다는 걸 전해 듣고, 17일 오전 11시에는 홍 변호사 집에 모여 회의를 하고, 저녁 11시 넘어서는 비상계엄령이 확대 발표되고….”

대한민국 민주화의 산증인 최운용 선생은 3시간여 동안 막힘없이 5·18민중항쟁(5·18) 전중후의 기억을 읊어 내렸다. 80대라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그는 각 사건이 발생한 시각과 장소, 관련된 수십 명의 이름을 단 한 자도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1980년 당시 그는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민주헌정동지회 △전남송죽회 소속으로 활동하던 민주운동가로서 군사 정권에 대항하는 반정부 투쟁에 힘쓰고 있었다. 5·18이 발생하자 동료 운동가들과 함께 광주를 지키며 학살과 시위 현장을 수습했다. 최 선생은 “맞고 쓰러진 학생들을 구하러 뛰어다녔다”며 “19일부터 살생이 계속됐었다”고 말했다. 공식 기록상 21일에 첫 발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지만, 기록되지 않은 살생이 있었다는 증언이다.

5·18이 이어진 열흘간 최 선생은 투쟁 동료들과 끝없이 수습 대책회의를 했다. 27일 공수부대가 도청에 진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홍남순 변호사, 김성룡 신부 등 6명은 계엄사에 찾아가 군의 광주 시내 진입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는 “26일 저녁 시민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뜻을 보이기 위해 마지막으로 모인 것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

27일 최후 항쟁 이후 국가로부터 수배령이 떨어지자 최 선생은 트럭에 무를 가득 싣고 장사꾼인척 서울로 도피했다. ‘국기 문란 계엄법 위반’이라는 죄목 아래 6월 17일부터 전국에 수배 벽보가 붙었지만 최 선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5·18 역사를 알렸다. 극비에 광주에 내려와 5·18 재판 기록을 빼내서 해외에 알리려 노력하기도 했다.

수배령 이후 약 2년 만인 1982년 4월 7일, 수배자 25명 중 마지막으로 체포된 그는 구타 고문을 당하며 조사 받았다. 최 선생은 “지금 5·18민주광장에 있는 종탑 자리가 당시에 고문당했던 곳이다”며 “다른 사람들은 전기 고문, 물고문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박관현 5·18 당시 우리 대학 총학생회장, 기종도 선생 등과 함께 수감 생활을 버텼다. 박 열사가 모진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교도소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항의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문과 단식 투쟁 등으로 인해 박 열사와 기 열사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5·18은 50여년 투쟁 인생의 일부분이자 남은 인생을 바칠 대상이다. 현재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고문으로 있는 그는 5·18 위상 정립을 위해 힘쓰고 있다. 최 선생은 “5·18유공자가 아직도 국가유공자가 되지 못했다”며 “5·18 정신을 이어갈 국가적 차원의 대책이 미흡하다”고 꾸짖었다. 5·18유공자는 국가유공자가 아니기에 연금 수령 대상이 아니고, 80세 이상 생계곤란자만 월 10만원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역대 수많은 정권이 5·18헌법전문수록을 약속했지만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최 선생은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소멸된다”고 말한다. 그는 5·18을 사실 그대로 기술하고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5·18은 전남 시·도민 모두가 맞서 싸운 역사”라며 “국가와 정치권이 5·18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운 사람들은 그저 “시대와 국가를 위해 모였던 민중”이었기 때문이다.

최 선생은 5·18이 국가적 인정을 받을 길은 멀었지만 국민적 인정은 받고 있다고 본다. 작년 12·3 계엄에 대해 그는 “만일 계엄이 확대되었더라도 국민들은 맞서 싸웠을 것이다”며 “모두가 80년 광주를 기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5·18 역사가 있기에 독재가 반복될 일은 없다고 믿는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