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정신, 창립 정신…순간을 기억하는 조형물들

우리 대학 숨은 조형물 찾기

2025-06-01     고민서 기자, 윤정훈 수습기자

5·18 기리는 삐라소년·임을 위한 행진
서강고에서 우리 대학으로 이사 온 참교육비
용봉캠 중심 지키는 용봉탑·초대 총장 동상

우리 대학 곳곳에는 수많은 조형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대신문>이 개교 73주년을 맞이해 역사와 의미를 가진 조형물들을 소개한다.

삽화 박서지

1980년과 현재를 잇는 메신저: 광주민중항쟁도 ‘삐라소년’

광주민중항쟁도 벽화와 삐라소년의 모습.

도서관 별관(백도) 옆 미래 1호관(구 사범대 1호관)에는 ‘광주민중항쟁도’ 벽화가 눈에 띈다. 이 벽화는 5·18민중항쟁(5·18) 10주년이던 1990년, 그림패 ‘마당’, 미술패 ‘신바람’, 사범대 미술교육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처음 그려지고 지난 2017년 복원된 것으로, 광주 오월을 압축한 장면과 통일 열망을 담고 있다. △총 든 왼손을 힘차게 뻗은 청년 △군용지프에 올라탄 시민군 △가마솥으로 밥 짓는 여성 △백두산 천지와 팔짱 낀 청년들 등이 그려져 있다.

벽화를 등지고 백도를 바라보면 노란 옷을 입은 소년 형태의 작은 철제 구조물이 보인다. 이는 벽화 속 인물 중 하나인 ‘삐라소년’이다. 2017년 당시 벽화복원준비위원장이었던 변재훈 민주동우회 부회장은 “소년이 투사회보를 뿌리고 있는 모습을 그렸기에 삐라소년이라 부른다”고 말했다. 투사회보는 5·18 당시 시민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제작됐던 유인물이자 저항 언론이다. 삐라는 ‘전단’을 뜻한다.

삐라소년은 1990년 당시에는 없었지만 지난 2020년 ‘민주길 조성사업’에서 벽화 앞 공간에 벽화마당이 만들어지며 생겼다. 삐라소년을 설계한 조동범 조경학과 명예교수는 “삐라소년은 형태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2차원의 벽화와 3차원의 현실 세계를 이어주는 메신저 역할”이라며 “80년의 이야기를 현재 사람들에게 전하는 상징적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벽화 속 수많은 인물 중 삐라소년만 구조물화 된 이유는 ‘삐라’라는 메시지를 들고 있기에 메신저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삐라소년 주변에는 벽화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브릿지와 작은 정원이 마련돼있다. 조 교수는 “벽화마당에 의자도 두었었는데 관리가 안 되어 사라졌다”며 “다시 설치돼 시민들이 벽화 앞에서 쉬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교조 교육 정신 담은 ‘참교육’ 비석

참교육 비석 뒷면. 전교조 합법화에 대한 염원이 적혀 있다.

사범대 교육융합관 앞에는 ‘참교육’이라고 적혀있는 비석이 있다. 비석은 서강고 학생들이 처음 세운 것으로, 1989년 당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합법화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다. 1989년 전교조가 생기고 탄압에 의해 교사 3명이 해직되자 서강고 3학년 학생들은 교정에 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졸업식 날 새벽 학교 측이 몰래 비석을 숨겨 행방이 묘연해졌다. 3년 후 국립광주박물관 근처에서 비석이 발견됐지만 서강고 측에서 돌려받길 거부하자 해직 교사 정희곤씨의 부탁으로 우리 대학 사범대가 맡게 됐다.

처음 우리 대학에 비석이 왔을 때는 사범대 주차장 한편에 세워졌었다. 언덕 위 풀숲에 가려져 내용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를 아쉽게 여기던 김회수 교육학과 교수가 2020년 사범대 학장에 부임하고 비석을 교육융합관 앞으로 옮겼다. 김 교수는 “‘교육다운 교육’을 외치는 참교육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이 비석이 풀밭에 방치되는 것에 불만을 가졌다”며 “사범대의 이념과 참교육비의 역사를 고려해 교육융합관 완공 후 바로 비석을 옮겼다”고 말했다.

참교육비의 뒷면에는 ‘1989년 5월 28일 민주 인간화 교육을 위하여 전교조의 깃발이 세워졌다. 이 비는 참교육의 실현을 위해 애쓰시다가 부당한 탄압에 의해 해고당하신 선생님들의 복직과 전교조의 합법성 쟁취 그날을 위해…’라는 글이 적혀있다.

오월 정신을 기억하며, ‘임을 위한 행진’

5·18광장(봉지)을 바라보면 커다란 조형물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이는 9.4m 규모의 5·18 상징 기념 조형물 ‘임을 위한 행진’이다. 지난달 26일 봉지에서 피크닉을 즐기던 전아무개(기계공학·25)씨는 “봉지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때 조형물이 눈에 띄어서 찾을 수 있었다”며 “임을 위한 행진은 봉지의 상징인 것 같다”고 말했다.

임을 위한 행진은 교수·학생·직원·시민 4명의 인체 형상이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는 형태를 보인다. 오월 정신을 기억하고, 사랑과 포용을 갖고 진취적으로 나아가자는 공동체적 의미를 가진다. 지난 2004년 5월 18일, 선배들의 민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조형물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정아무개(신소재공학·22)씨는 “자세히 보니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며 “동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홍보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표지석에는 ‘1980년 5월, 이 나라 민주주의의 역사가 이곳에서 새로 시작되었다. 겨레의 가슴 속에 불덩이로 일렁이던 민주화의 염원은 용봉의 더운 피로 용솟음쳤고, 임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중략) 전남대학의 웅혼한 기상과 용봉인의 거룩한 희생을 이어가기 위하여 그날의 뜨거운 외침을 이 자리에 새긴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용봉캠퍼스의 상징 ‘용봉탑’

우리 대학 용봉캠퍼스 중심에는 용과 봉황이 승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용봉탑’이 우뚝 솟아있다. 1976년, 개교 24주년이 지났음에도 우리 대학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없자 호국단 간부들이 총장에게 용봉탑 건립을 건의했다고 전해진다.

<전남대학교 60년사>에 따르면 당시 학생들을 대상으로 건립 설문조사를 진행했고, 83%가 동의했다고 한다. 높이 13.63m, 폭 4.45m의 규모의 용봉탑은 50년 가까이 용봉캠퍼스를 지키고 있다.

오랜 시간 자리를 지킨 만큼 용봉탑에 얽힌 전설들이 있다. 용봉탑 꼭대기에 있는 봉황은 모빌로 만들어져 바람이 불면 돌아가는데, 3월경 봉황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의 단과대가 그해 가장 취업률이 높다는 말이 전해진다.

자정 시간 진정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연인이 용봉탑에 올라가면 봉황이 진짜 새가 되어 날아간다거나, 봉황이 내려와 용봉탑 아래 서 있는 연인을 감싸 안아주면 영원한 사랑이 맺어진다는 등의 이야기도 있다.

첫 지도자를 기억하는 ‘최상채 초대 총장 동상’

용봉탑에서 경영대·사회대로 올라가는 언덕 입구에는 동상이 하나 있다. 위풍당당하게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서 있는 이 동상은 우리 대학 초대 총장인 고(故) 최상채 박사 기념비다. 1978년 대강당(현 민주마루 위치) 앞을 지키던 동상은 지난 2016년 민주마루 리모델링 공사 후 현재 자리로 옮겨졌다.

지난달 28일 동상 앞을 지나던 장준혁(45)씨는 “무슨 동상인지 잘 몰랐다”면서도 “학교 발전에 기여한 사람을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상채 총장은 1952년부터 1960년까지 8년간 대학 발전을 위해 힘썼다. 1973년 최 총장이 별세하고 5년이 지난 1978년, 우리 대학 동문회가 최 총장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동상을 세웠다. 조각을 담당한 고(故) 김행신 미술교육과 교수는 사진만으로 최 총장을 입체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워 최 총장의 아들인 고(故) 최원 의과대 교수를 모델로 두고 동상을 제작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