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춘 공간과 교차하는 시간

2025-06-01     정소희(사회학과 박사과정)

지난 한 달 옛 광주적십자병원은 전시 “멈춘 공간의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통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11년 만이었다. 병원 응급실 병상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1980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18 당시 전남도청과 인접한 옛 광주적십자병원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쇄도했고, 의료진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투했다. 본관 뒤편 영안실과 마당에는 여러 구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되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헌혈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았다.

2020년 광주광역시는 병원 부지를 매입했다. 역사교육 공간 보존과 활용이라는 매입 목적이 말해주듯 공간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맞춰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5·18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인 전시기획자에 의해 공간의 기억이 재구성되면서, 공간은 2014년을 경유하게 되었다. 적십자병원이 1996년 서남대학교병원으로 인수되어 개원한 이후 폐쇄된 때였다. 침대, 산소통, 뜯어진 진료실 천장, 2014년 이후 넘어가지 않은 달력, 오래된 자판기, “병원 내부사정으로 인하여 2013년 12월 09일(월) 13시부터 휴진임을 알려드립니다”라고 적힌 안내문은 ‘멈춘 공간의 이야기’를 말해주고 있었다.

공간의 시간이 2014년에 멈춰 있는 것은 아니다. 5·18의 현장에 있었던 안내해설사는 다음 세대에게 1980년 5월 이야기를 전하면서 흐르는 시간을 맞이했다. 또한 전시 일부는 ‘새로운 시작’을 모색하는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고 있었다. 광주에서 각기 다른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은 이 공간에 대해 다른 열망을 품고 있었다. 1980년 5월 당시로 복원을, 어려운 경제를 살리기 위해 마트나 상가로 활용되기를, 나눔 정신을 실천하는 무료급식소나 젊은이들이 찾는 예술센터로 재탄생하기를 바랐다. 이처럼 옛 광주적십자병원은 각자의 5·18을 상상하는 공간이 되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진 11년간 이 공간에는 또 다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야외마당 한켠에 쌓인 페트병, 나뒹구는 신발 한 짝, 느긋하게 산책하는 턱시도 고양이는 그동안 이 공간이 누구에 의해 흐르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콘크리트 균열과 외벽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초록 잎들도 조용히 자리를 넓혀왔다. 덩굴식물의 줄기는 바닥에 떨어진 철사를 타고 처음 보는 형상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병원의 역사보다 오래되었다는 팽나무와 느티나무는 야외마당의 변화를 지켜보면서 시간을 관통해왔다. 한때 주차장으로 사용되었던 야외마당 출입구에 펜스가 세워지자 팽나무와 느티나무 가지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방으로 마음껏 뻗어 나갔다. 그 잎사귀들이 부딪히며 내는 바람 소리는 5월을 맞아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의 발소리, 말소리와 어우러져 고유한 음색을 만들어냈다. 이 공간에는 1980년, 2014년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이 교차하며 공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