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고 벌어서 남한테 쓰는 게 마음이 더 좋아”

■고추 따서 번 돈 1억 우리 대학에 기부한 김정순 할머니 함평 자택 르포

2025-07-24     박승빈 수습기자

9살때부터 만날 먹은 마음 “돈만 모으면 장학금 낼란다, 낼란다 노래를 불러”

함평군 해보면 김정순 할머니 집 앞 풍경.

장맛비가 고요히 내리던 7월 13일 일요일 함평군 해보면. 김정순 할머니(81)의 집 앞에 섰다. 담벼락 앞에 멈춰선 경운기, 처마 끝에 매달린 물방울, 비에 젖은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특유의 마른 채소 향이 코를 찔렀다. 마루에는 잘익은 붉은 고추들이 놓여있었고, 할머니는 방 안 낮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고추) 오늘 아침에 딴거여, 저기 밖에도 있어.” 

밝은 미소로 조심스레 보여준 할머니 손에서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오른손 엄지에는 헤진 밴드, 손목에는 파스가 붙어 있었고 손톱은 채소를 손질하다 착색된 듯 검은 색이었다. 몸은 다소 수척했는데 할머니는 농사일이 갈수록 힘들다고 말했다. 

“젊었을 때 사진 보면 (벽면에 걸린 사진 가리키며) 저때가 57kg였는데. 이제는 40kg도 못나가. 37kg. 빼빼 말라가꼬.” 

김정순 할머니가 직접 딴 붉은 고추.

올해로 여든을 넘긴 김정순 할머니는 지금도 매일 채소를 거두고, 금요일이면 채소를 팔기 위해 상무시장(광주)으로 간다. 그렇게 모은 돈 1억원을 2018년 우리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대학에 장학금을 기부하는 일은 할머니의 오랜 소망이었다. 평생 못다 이룬 배움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은 꿈꾸며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소망. 

방 안 곳곳에는 여러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학사복을 입고 꽃다발을 든 모습, 어린 자제들, 남편과의 한때. 사진 속 할머니는 지금보다 살집이 올라있었고 눈가에는 주름 대신 웃음이 가득했다. 웃음은 오래전 사진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장학금 수여식의 사진을 보면 할머니의 눈가에는 여전히 그날의 미소가 있었다. 

2018년부터 지급된 우리 대학 <김정순 장학금>은 매년 4명의 학생에게 300만원씩 전달됐다. 올해가 지급 8년째이고 지금까지 28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이 지급됐다. 공식적인 장학금 수여는 내년에 끝이 나지만 할머니는 “끝”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 주고 나면 400만원이 남아. 내년에 200만원 보태서 150만원씩 4명 더 줄거여.”

장학금 관련 기념 자료들이 들어있는 보따리는 방 안 텔레비전 옆에 놓여 있었다. 보따리 안에는 장학금 수여식에서 받은 상장,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보낸 편지가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할머니는 천을 한 겹씩 걷어내며 보따리를 풀어 보여줬다. 봉투마다 이름이 적힌 편지들은 구겨지지 않고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다고 했다. ‘의학과 4학년 정우진’. 할머니는 정우진의 편지를 수없이 읽었다고 말했다. 기자에게 정우진 학생의 편지를 보여주며 괜히 한참을 가만히 있기도 했다. 

“얼마나 착한가. 장학금 두 번을 줬어. 나 태어나서 처음 우진한테 선생님 말 들어봤어.” 

김정순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진. 아들 대학교 졸업식, 학사복을 입고 서 있다.

김정순 할머니는 배우고 싶었으나 배우지 못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내 형제가 아들 셋에 나 딸 하나여. 아버지가 부자로 살았어. 우리 시대에는 여자는 안가르쳤어. 근디 국민학교는 다 다녔어. 친구들 다 학교다닌디 내가 학교 사흘 간께 우리 아버지가 책 다 뺏어가꼬 꼬실라브러. 여자는 갈치면 쫓겨난다고. 그래서 야학을 다녀. 학교 안다니는 사람은 야간학교를 다녔어. 다 농사짓고 산께 농사 안짓던 사촌오빠가 야학 선생이었어. 내가 두 달 배워가꼬 구구법은 대학생 못지않고. 국문도 다 알고. 긍게 장사하지. 그것도 못 배웠음 장사 못해.”

그리고 먹은 마음. ‘돈 벌 면 장학금 줘야지.’ 

“나는 9살 때 애기 업고 다니면서 돈 벌면 장학금을 내야쓰겠다고 생각했어. 결혼해가꼬 살면서도 애들한테 나는 돈만 모으면 장학금을 낼란다, 낼란다 했어. 아들딸이 반대 안했어. 내가 장학금 노래를 불렀거든.” 

김정순 할머니의 웃는 모습. 여든을 넘긴 지금도 그는 “돈 벌면 웃어, 남한테 쓰면 더 좋아”라며 매일 밭일을 하고 있다.

김정순 할머니에게 인생 가장 행복했던 날은 2018년 11월 6일이다. 그날은 그녀가 우리 대학에 장학금 1억원을 기부한 날이다. 기부금 전달식이 있던 날 당시, 정성택 총장이 물었다.

“살아오시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하셨어요?”

“오늘이요. 오늘이 제일 좋아요.”

총장은 그 자리에서 말했다. 

“열 번이라도 안아드리고 싶습니다.”

그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이 한 몸으로 모였던 순간이었다.

김정순 할머니는 우리 대학에만 장학금을 기부한 건 아니었다. 매주 금요일 채소를 팔러 가는 상무시장에서 만난 이웃에게도 장학금을 건넸다. 

“그 양반이 딸 둘 낳고 아들 쌍둥이를 또 낳았어. 사는게 보통이 아니제. 그런 사람한테 줘야지. 부자한테는 안 줘. 가난한 사람한테만 줘.” 

할머니에게 장학금은 그녀가 누리지 못한 배움의 기회를 그것을 필요로하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일이었다. 

“마음이 그래. 내가 못 배웠기 때문에.”

집 앞 정자에 앉아 있는 김정순 할머니.

왜 이렇게 베풀고만 사셨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다시 입을 열었다. 

“문장(터미널)까지 멀잖아. 여기서 문장 걸어 다녔어. 천원 아끼려고 걸어 다녔어. 그렇게 아끼고 벌어서 그 돈 남한테 쓰는 게 좋아. 마음이 좋아. 내가 쓴 놈보다 더 좋아. 내가 못 배웠기 때문에 내 마음이 그래.”

할머니가 말하는 그 ‘마음’에는 그녀의 80년 세월이 있었다. 성실히 농사지어 번 돈이 누군가의 삶에 작은 빛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려 하자, 할머니는 수화기를 들었다. 

“비 오니까 택시 타고 가.” 

김정순 할머니는 전화로 택시를 잡아주고는 집 앞 정자까지 기자와 함께 나왔다. 고무신을 챙겨 신는 모습이 분주했다. 택시가 도착하자 할머니는 차 앞좌석 문을 열고 택시비를 대신 내주었다. 한사코 거절했지만 결국 문은 닫혔고 택시는 터미널로 향했다. 기자의 뒤로 손을 흔드는 할머니의 모습이 점점 멀어지며 작아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