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영국 정부는 2018년 ‘외로움’을 다루는 부서를 신설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로 따지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 장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에게 뜬금없어 보이던 ‘외로움부’의 설립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브렉시트를 겪었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로움은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의 정신 건강과 사회적 안정을 해치는 질병이 되었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했으며, 2024년 서울시는 ‘외로움 없는 서울’이라는 고립·은둔·외로움에 대응하는 새로운 대책을 발표했다. 이 사례들은 외로움과 고독을 개인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관리해야 할 문제로 바라보고 대응하는 정책적 접근을 보여준다.
몇 년 사이 경제적 여력, 가족관계, 친구 관계와 외로움의 상관관계를 보여주는 학술 연구가 자주 보인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외로움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들 연구의 공통된 결론이다. 일반적으로 외로움은 개인적 문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조적 측면에 주목하지 않으면 외로움이 가져올 파멸적 결과를 간과하게 된다. 외로움의 사회적 위험성은 과거의 경험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19세기 후반에서 제1, 2차 세계대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산업화 과정을 겪으며 유럽인들이 느꼈던 뿌리뽑힘에 관해 이야기한다. 자신이 속한 곳이 사라지고 타자와의 유의미한 관계가 사라지면서 개인은 외로움에 휩싸인다. 고립과 외로움의 상태가 지속되자 개인은 그 대안으로 전체주의적 대중(mass)이 된다. 이때 대중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 있는 공적 의사소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렌트는 대중적 인간의 주요 특징을 “고립과 정상적 사회관계의 결여”라고 말한다. 고립된 개인의 무조건적 충성이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이때 고립된 개인들의 맹목적 충성은 곧잘 폭력으로 이어진다.
같은 시기의 사회 변화를 연구했던 경제학자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에서 19세기 자유주의 경제이론이 상정한 ‘자기조정 시장(self-regulating market)’이라는 유토피아적 프로젝트가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귀결되었다고 평가한다. 한동안 토지, 노동, 화폐의 증가로 인해 자기조정 시장은 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제국주의적 팽창으로 인한 풍부한 토지의 확보, 인구 증가로 인한 노동력 증대, 금융제도 발전으로 인한 화폐의 유동성 증가는 사회로부터 독립한 자율적 시장이라는 공간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시장은 기존의 공동체와 국가의 보호 기능을 제거하게 된다. 시장이 제 역할을 할 때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업, 불평등 증대, 외환 위기, 국제적 분쟁 등의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사회는 위태로워진다. 파시즘은 시장에 의해 사회적 보호 장치였던 공동체가 사라진 상황에서 시장조차 위기에 봉착했을 때 확산된다.
100년도 넘은 과거의 이야기지만 아렌트와 폴라니의 분석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위기상황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립과 외로움은 단지 개인의 위기가 아니라 사회적 위험 요소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외로움에 관한 대응이 단지 심리적 돌봄 문제에 그쳐서는 안 된다. 개인적 현상 이면에 있는 외로움의 위험성을 간과한다면 언제든 20세기 초의 위기는 반복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