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 합리성, 공동체

- 수의대 교수공채 불공정 시비를 지켜보며

2002-10-25     관리자
최근 29회 교수공채와 관련, 수의대를 비롯하여 일부 단과대학에서 일어난 불공정시비로 인해 대학 안팎에서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 사태를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볼 것은 아니다. 얼마 전에 국회에서는 두 차례나 연이어 총리인준 거부가 발생했다. 그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국정운영에 다소 차질이 빚어졌을지 몰라도, 흔히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병폐로 지적되는 도덕성의 결핍과 만성적으로 체질화한 부패에 대해 온 국민의 경계의식을 일깨워 줌으로써 향후 보다 건전한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이번 수의대 문제도 이 같은 관점에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 한편에서는 이웃집 싸움에 내 밥상이 더럽혀질까봐 불평하는 소리도 들리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여러 해에 걸쳐 유사한 문제가 반복 발생하는 수의대의 자치능력을 의문시하여 다른 단과대학에 위탁관리시키라는 요구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같은 대학 공동체의 한 구성단위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하나의 특수한 케이스로 한정해서 극단적 처방을 내리거나 섣부르게 처리하는 것은 잠정적으로 우리 대학 전체의 장기발전의 기틀을 약화시킬 소지가 있다. 따라서 이 사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해당대학은 물론이고 대학당국과 구성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공동 노력을 하는 것이 시급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수차례 개정을 통해 더욱 투명하고 세분화된 공채지침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공정 시비가 발생하게 된 맥락을 치밀하게 검토해봐야 한다. 대체로 불공정 시비는 평가기준의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하지만 아무리 규정을 복잡하게 만들어도 모든 가능성을 명시할 수 없으며, 더욱이 특성이 다른 모든 학문분야에 일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모순이다. 실제로 객관성 혹은 공정성이 문제되는 경우는 평가기준의 기술적 차원보다는 그 기준을 운용하는 주체들의 이해가 대립하는 데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흔히 ‘연고주의’ 관행이 교원임용의 공정성을 해치는 으뜸 요인으로 지적된다(교수신문 234호 조사자료).
이번 수의대 공채문제를 보아도, 심사위원들이 2대2로 양분되어 각각 공정관리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공정관리위원회와 평의원회가 평정서에 심사위원 전원이 날인한 것을 근거로 문제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본부가 문제의 공채를 계속 진행하도록 지시하자 다시 외부기관의 감사를 요청하는 집단청원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이번 불공정 시비를 단순히 기술적인 차원으로 환원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수의대를 비롯하여 기타 공채관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대학 공동체 구성원 상호간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한계지점을 정밀하게 진단하여 합의점을 찾아내고 상호 신뢰를 회복함으로써 다시 민주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아울러 대학당국도 규정과 절차상의 기술적 합리성만을 고집하는 경직된 자세를 버리고, 적극적으로 소수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하려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특정한 상황과 맥락을 떠난 합리성이란 전체주의나 파시즘적 권력행사이든지, 아니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 교육인적자원부의 요구에 따라 대학내 자체 진상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결과에 따른 본부의 대응이 주목되고 있다. 진상조사위원회는 수의대 문제의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대학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엄정하게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총장은 공동체 운영의 책임자로서 정치력을 발휘하여 이 문제에 대해 슬기로운 해법을 도출함으로써, 앞으로 2년 남은 임기 동안에도 계속 구성원들의 지지를 받아 대학운영에 추진력을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비가 온 뒤 땅이 더욱 단단해지듯이 이번 사태를 우리대학의 악재로 남기지 않고 오히려 대외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발전적 계기로 바꾸어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 모두 그릇된 관행을 흔쾌히 시정할 수 있는 용기와 책임감이 있는지 자문해봐야 한다. 동시에 이질성을 차단하기보다 포용할 때 새로운 생성이 가능함을 인식하고, 자신과 입장이 다른 구성원과 대결 대신 대화를 통해 우리 대학의 이념인 진리․창조․봉사를 명실상부하게 실천할 수 있는 교육연구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이다. /전대신문 사설(9월23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