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년(戊戌年)이다. 12년만에 돌아오는 개띠 해이자, 60년만의 황금개띠해이기도 하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곧게 흐르면서도, 순환 반복한다. 자연의 현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순환형 시간관을 사용해온 한자문화권에서는 하늘에 해당하는 10간(干)과 땅에 해당하는 12지(支)를 조합하여 60년을 한 주기로 삼았다. 10간의 중간인 무는 오행으로 보자면 토행(土行)으로서 황색에 해당한다. 한편 고대 중국에서는 주변 문화권의 관습을 받아들여 12지를 12동물에 비정하여 띠동물로 삼았다. 금년은 무술년이기 때문에 무가 곧 황색이요, 술이
2003년 봄부터 ‘인문대 1호관’ 건물 철거에 대한 학내의 논쟁은 뜨거웠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대학본부와 구성원간의 활발한 토론의 결과 철거하지 않고 보존을 택하게 되었지만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뜻깊은 결정이었다. 그러던 차에 문화재청으로부터 전남대학교 최초 건물이라는 역사성을 인정받아 2004년 9월 4일에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96호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사회대 앞 정원에는 중앙도서관 용도로 ‘금호각’을 지었다. 아마도 풍수지리상으로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다는 ‘용주마을’의 뒤쪽 구릉에 위치해서 용의 머리이니 여기에서
홀로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 비장애인에게도 버거운 일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은 어떨까? 장애를 가지고 있는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장애인은 대부분 보호자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곁에는 항상 보호자가 있다.필자는 초등학생 때 등하교를 하며 아파트 단지 안에서 또래의 발달장애인을 마주친 적이 있다. 항상 어머니와 함께 다니던 그 친구는 어머니가 이웃과 대화하는 사이 이리저리 뛰어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매일 그 친구를 돌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세월이 흘렀고 그 친구도 어른이 됐다. 그의 곁엔 여전히 어머니가 함께 있다.
예로부터 용봉캠퍼스는 명당이라고 소문났다. 사회과학대학과 인문대학을 거쳐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지는 나지막한 언덕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 마을을 휘감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형 명당이라 전해왔다. 특히 사회대와 인문대 건물 자리가 그냥 보통 명당자리가 아닌 세 명의 재상과 천 명의 문인, 만 명의 무인을 배출하는 천하의 명당이라는 것이다.그동안 용봉동이라는 지명을 활용해서 ‘용비’와 ‘봉비’라는 캐릭터와 봉지, 용봉탑의 정상에 봉황을 만드는 등 ‘용’과 ‘봉황’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 왔다. 하지만 용봉동의 지명 유래를 생각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데려갈 거야어쩌면 꽃들이 아름다움으로너의 가슴을 채울지 몰라어쩌면 희망이 너의 눈물을영원히 닦아 없애 줄 거야그리고 무엇보다도,침묵이 너를 강하게 만들거야.시집 중에서 시집의 제목으로 인용된 댄 조지의 ‘어쩌면’이라는 시이다. 화자는 별, 꽃을 바라보며 힘든 일을 잊고 조용히 생각하다보면 시련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다고 말한다. 중간고사, 많은 과제들로 지친 하루에 높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있다. 그 순간에는 고민하고 있던 것들은 잊고 “아름
※ 대학역사연구회는 우리 대학 직원 15명이 모여 5년 째 교정 내 역사문화재나 기념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연구회이다.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메타세쿼이아가 우리 대학 교정에서 자란다니… 천연기념물로라도 지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조용하기만 하다. 치과대학병원 앞에 하늘 높이 치솟은 늠름한 자태의 나무. 뿌리 주변이 온통 아스팔트로 뒤덮여 나무가 잘 자랄까 걱정이다.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정하도씨(광주에서 양묘장 경영)가 일본에서 묘목 10여 그루를 어렵게 들여와서 그 가운데 3그루를 우리 대학에 학술연구용으로 기증했다. 1
"우리는 모두 김지영이다." 의 한줄 평이다. 누군가에겐 '격한 공감'을 일으키지만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 아닐까.의 김지영은 언니와 남동생이 있다. 김지영과 언니 김은영은 어렸을 적 짝짝이 젓가락을 사용하고, 그들의 내복 상하의는 서로 다르고, 동그랑땡 남은 조각을 먹는다. 그러나 남동생은 항상 갓지은 밥을 먹고 이불도 혼자 덮고 우산도 혼자 쓴다.국민학교에 다니게 된 김지영의 선생님은 짝꿍에게 놀림을 받은 김지영에게 "원래 남자애들은 좋아하는 여자애한테 장난치더라. 짝꿍이 지영
늘 궁금했었다. 누가 물어 봐도 자신 있게 대답해 주지 못했다. 표지석의 문구만으로는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당시 대학신문을 들추어보니 ‘제막 앞둔 용봉탑’(전남대학보, 1978. 5. 18. 발행)이란 기사가 반갑기만 하다.대부분의 대학들은 나름대로 상징적인 탑을 가지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초·중·고등학교에도 상징탑이 있다. 상징탑(용봉탑)은 제2대 호국단시절인 1976년 11월 9일에 당시 사단장이하 호국단 간부들이 민준식 총장에게 상징탑의 건립을 건의해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의 의견조사 설문지에는 ‘개교 24주년이 지난 오늘
2017년 화두였던 문재인 대통령의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 공약. 이는 본래 존재하는 교사 검증 제도인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도 몇 년의 학교 근무를 통해 정규직 교사로 임명되는 공약이다. 이에 대해 전국의 예비교사들은 물론이고 일반인들조차 갖은 의문과 비판을 쏟아냈다. 정규직화 공약의 취지는 기간제 교사들이 합당한 권리를 누리게 해 한국 사회를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확실히 기간제 교사의 처지가 정규 교사들에 비해 많이 열악한 것은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장기간 근무를 할 수 없어 고용의 불안에 시달
‘용지’는 단순히 관상용이나 조경차원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1969년 어느 날 총장실에 들른 백발 도인은 유기춘 총장에게 “연못이 있어야 용이 승천하는데 뭐하느냐!” 호통을 쳤다고 한다. “용이 승천해야 대학에 큰 인물이 날 텐데” 혀를 끌끌 차면서…다행히 영문학과 동문인 송호림 장군이 ‘CAC’(전투병과 교육사령부, 흔히 ‘상무대’라는 군사교육기지) 사령관으로 있어서 중장비를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69년 여름부터 연못을 파기 시작하여 1971년에 완공하였다.유총장이 임기도 끝나기 전인 1974년에 문교부장관
나는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온양온천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성인이 될 때까지 자랐다. 나의 고장에서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에 큰 변화를 가져와준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나에게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그저 교과서 속 지식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욱 연극 “오!금남식당”를 보며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오!금남식당”의 줄거리는 이렇다. 금남관의 주인인 ‘오금남’이 식당을 물려받을 후계자를 뽑기 위해 요리 경연을 개최한다. 경연자들은 오금남의 미션에 따라 요리 실
대개의 사람들이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은 잊어버리는 것이다. 5·18민중항쟁의 아픔은 잊어야 할 무언가는 아니었을까. 누군가는 죽였고 누군가는 죽었다. 세월은 흘렀고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듯 조금은 잊어버렸다.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면서 광장에 있던 탄흔도 지워졌다. 폭력을 주도하고 군림했던 사람이 자기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고통을 떠올리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그러한 외면이 가해자의 자기변명이 되는 것 역시 께름칙한 일이다.역사의 한 장면으로 5·18민중항쟁을 기억하고 있지만 그들이 말하는 광주정신에는 의문을 표하는
나는 인도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온 지는 벌써 2년이 조금 넘었고 광주에서 지낸 지는 이제 1년 반 정도 됐다.내가 광주로 유학을 온 이후 가장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가 “왜 (혹은) 어떻게 서울이 아닌 광주로 유학을 왔어요?”다. 나는 이 질문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단순히 “교수님께서 전남대를 추천하셔서 왔어요.”라고 대답했었다.그러다 우연히 광주의 위대한 역사를 접하게 됐다. 그리고 그 날 광주의 중요한 역사 중 하나인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알게 됐다. 그 후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던 나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해 더 자
우병우는 아직까지도 최순실을 모른다고 했다네요. 나, 원, 참. 우리도 우병우라는 사람을 모르고 살았으면 좋았을 뻔 했어요. 우리의 정신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국가도 해치는 여럿 분들을 바라보며 여러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우병우와 같은 사람은 어떻게 탄생하는 것일까. 어떤 결핍과 어떤 콤플렉스, 어떤 갈증으로 자신을 그렇게 만들고, 국가를 이렇게 만드는지 우리는 다시 또 개인과 사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동시에,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나’로까지 생각이 미치게 됩니다.내 상처와 결핍을 성찰하고 또 성찰하면서 내가
이 글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많이, 정말 많이 망설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지금도 많은 생각이 교차한다. 나의 대학 생활 7년(군생활 포함)이 누군가에게 귀감이 될 만한 시간이었던가? 졸업 후 4년이 지난 지금, 나는 누군가에게 귀감이 될 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나?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지금 졸업의 문턱을 막 넘은, 새 출발이라고 하기엔 뭔가 꺼림칙한 마음에 시달리고 있는, 그 누군가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기 때문이다.2011년 겨울, 졸업을 생각하던 즈음에 자연
기술의 발달로 몇 년 사이에 운전자에게 가장 필요한 자동차 용품은 네비게이션이 되었다. 네비게이션이 생기면서 더 이상 길을 찾느라 빙빙 돌지 않아도 되었고, 도착지까지 몇분이 걸리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속도와 정확성이 중시되는 현 시대에서 네비게이션은 우리 삶 속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먼 훗날, 기술의 발전으로 인생 성공 로드맵을 알려주는 네비게이션이 발명된다면 어떨까?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혹여 잘못된 길로 향할 때 알람이 울리는, 그런 기기가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망설임 없이 기기를 구입하
PHS 총장명예학생팀은 작년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졸속합의’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여 위안부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는 탐사를 계획했다. 위안부는 1991년 8월 14일 故김학순 할머니의 공개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이후 많은 사람들의 후원을 통해 1992년 1월 8일 일본정부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올해로 25년을 맞이한 세계에서 가장 긴 시위가 되었다. 하지만 최근 ‘한일 위안부 합의’가 당사자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밀실에서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우리들은 한일
이번 선거를 지켜보는 학생으로서 슬픔을 감출 길이 없다. 진실-거짓이 여과되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고, 조직은 각종 비리, 이해할 수 없는 일 처리 등으로 신뢰를 잃었으며, 그로 인한 선거 보이콧까지 발생했다. 하지만 나는 보이콧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다. 보이콧의 과정, 이유 모두 타당하나 우려하는 마음이 있다. 보이콧의 목적은 정당하고 깨끗한 선거를 하고자 함일 것이다. 이것은 선거시행세칙 개정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필요하고 부당한 세칙을 개정해야 이룰 수 있는 목표이기 때문이다. 세칙 개정
보이콧 운동은 정치 혐오의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정치 참여의 결과이다. 보이콧 운동은 학생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를 소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 학생들이 원하는 선택지를 적극적으로 ‘직접 만들어 내는 활동’이다. 핵심은 현 중선관위에 대한 불신에서든, 아니면 불합리한 선거시행세칙에 대한 문제의식에서든, 지금 제시되고 있는 선택지 안에서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보이콧 운동은 학생들이 직접 만들어낸 선택지다. 다시 말해, 보이콧은 뚜렷한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Still Alice, 2014)를 보면서 메모해 둔 문장, “영원한 상실은 없으니까.” 이 메모를 나중에 들여다보면서, 어디 장면에서 누가 한 대사였더라, 떠올려 봤다. 앨리스 역을 연기한 줄리안 무어가 했던 말이었나…. 결국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저 대사를 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야 다시 만났다. 앨리스를 돌보기 위해 연극을 포기하고 엄마의 곁으로 날아온 천사, 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 리디아는 언어를 잃은 엄마에게 토니 쿠시너(Tony Kush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