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사회비판적이라 생각 안 해”
다큐 찍으며 인식 지평 넓어져
‘위안부’ 할머니 웃음 보며 뿌듯

변영주 영화감독의 최근작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이 8회를 끝으로 지난 9월 종영했다. 한 여성이 연쇄살인범으로 수감된 가운데, 누군가 그녀를 모방한 연쇄 살인이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한국 독립영화계를 대표하는 여성 감독이자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상 처음으로 극장에 개봉되는 기록을 세운 변 감독은 “감독이 아닌 작품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화차> <발레교습소> <낮은 목소리> 등이 있다. 지난달 28일 우리 대학을 방문한 변 감독과 인문대 313호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엮은이

인문대 313호에서 변영주 영화감독이 신문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인문대 313호에서 변영주 영화감독이 신문방송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모습.

“영화는 사회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요?”

“못 일으킵니다.”

변영주 감독은 단호했다.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만든다는 평을 듣는 그이지만, 스스로 “내가 사회비판적인 영화를 만드는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앞으로도 계속 ‘여성 서사’를 다룰 건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가장 최근 작품인 <사마귀: 살인자의 외출>만 해도 그렇다. 그는 강연에서 “이 작품이 여성을 다뤘다고 하기에는 여성이 되게 무서운 사람이고, 연쇄살인범이고, 저는 연쇄살인범을 모른다”고 설명했다. 영화 <화차>도 마찬가지다. 화차는 여성을 다루었지만 여성만을 다루지 않았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라는 작품은 억울한 남자의 이야기였다.

변 감독은 자신이 사회 운동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성이나 소수자의 이야기를 특별히 더 다룬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그는 “세상을 바꾸고 싶고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휴식처럼 내 작품을 보고 쉬면 좋겠다는 마음이다”고 말했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건 사회를 향한 거대한 포부나 의식이 아닌 ‘인간에 대한 관심’이다. 변 감독이 1995년부터 7년 동안 찍었던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피해자들 즉, 그동안 역사적 비주체로 간주되었던 ‘할머니들’의 기억과 증언을 기록한 작품이다. 심혜경 영화연구자는 2019년 한겨레에서 총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을 “여성 영화인들의 다큐멘터리 집단에서 만들어낸 여성주의 영화였다”는 평을 했다.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를 제작하게 된 계기에 대해 “처음부터 위안부 피해 여성에 대한 접근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보다는 “우연한 기회에 만난 위안부 할머니들이 저를 흥미롭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변 감독이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났을 때, 변 감독이 영상을 찍는 사람이라는 걸 알자마자 할머니들은 변 감독을 내쫓았다. 그는 “영상을 찍을 생각조차 없었는데 절 쫓아내는 걸 보고 흥미가 생겼다”며 “숨겨왔던 피해 사실을 세상에 알렸을 때 이분들의 삶의 변화가 궁금했다”고 말했다.

그렇기에 <낮은 목소리>는 할머니들의 ‘현재’가 중요했다. <낮은 목소리 1>은 당시 서울 극장 3곳에서 상영을 했다. 할머니들은 그중 한 곳에 매일 가 관객들을 살펴봤다. 그는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평생 자기라는 존재의 삶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하다가 자기가 나온 영상을 보고 좋아하는 관객들을 보며 일종의 치유가 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고,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할머니들은 행복해했고 변 감독에게도 그 순간은 큰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처음엔 한 편만 생각했던 <낮은 목소리>도 결국 3편까지 나오게 되었다.

대학 수업에서 결심한 감독의 길

‘영화, 내가 세상을 읽는 방법’을 주제로 변영주 영화감독이 지난달 28일 김남주기념홀에서 강연하고 있다.
‘영화, 내가 세상을 읽는 방법’을 주제로 변영주 영화감독이 지난달 28일 김남주기념홀에서 강연하고 있다.

이화여대 법학과에 진학했던 변 감독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여성학 연구’라는 수업 과제를 하면서다. 어렸을 때부터 영화와 소설을 좋아했던 그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공부를 못했다”는 그는 “법학개론이라는 수업을 듣는데 되게 재미가 없었다”며 “고등학생 때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고 말했다.

그 시기 들었던 여성학 연구 수업은 시험이나 리포트가 아닌, 직접 무언가를 만들어야 점수를 주는 수업이었고 변 감독은 친구들과 함께 ‘X’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는 “15분 정도 분량의 단편 영화를 엉망이지만 즐겁게 만들었다”며 “여기서 규모가 확장되더라도 이 일을 재미있게 할 거라는 생각에 영화의 길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데뷔작은 1993년 나온 다큐멘터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는 다큐멘터리로 감독을 시작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는 “인식의 지평이 넓은 상태에서 이 일을 시작한 건 아니다”며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지평이 넓어졌다”고 말했다. 이어 “내가 만드는 이야기의 원천이 되는 공간에 대한 이해와 사람에 대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야한다’는 말이 있다. 변 감독은 <낮은 목소리>를 만들면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할머니들을 찍으며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얼마나 다른지 봤다”며 “나무보다 숲을 보라고 하지만, 자세히 봐야 보이는 게 있다는 걸 배웠다”고 말했다. 이어 “이 마음이 이후 작품들에 긴밀하게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상 대신 구체적인 현실을

인터뷰 내내 변 감독은 당장의 ‘사는 이야기’를 했다. 기자가 조금이라도 가치나 미래, 사회 변화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 그는 늘 구체적인 현실로 돌아와 답했다. 지독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야기를 말이다. “감독님의 영화에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있는 것 같다”며 시민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제가 시민 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대신 영화 <화차>가 개봉됐던 2012년, 쌍용자동차 해고자 농성에 변 감독이 참여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변 감독은 덕수궁 앞에서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이 농성을 하고 있으니 와서 사회를 봐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 말을 듣고 변 감독은 “내가 쌍용자동차를 타고 있지도 않고 해고자 중 아는 사람들도 없는데 이 사람들의 아픔과 투쟁이 나와 어떤 연관관계가 있나” 고민했다고 한다. 그 연관관계를 알면 사회를 더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결론적으로 변 감독은 농성과 자신의 직접적인 연을 찾았다. 그는 “그분들이 해고됐기 때문에 금요일 저녁 가족과 영화 한 편 보고 외식하는 여유를 잃은 거다”며 “그런 여유를 가진 사람이 많을수록 영화계에겐 이익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을 “시민 운동가들을 되게 존경하고, 열심히 도움을 주고, 후원금이 필요하면 잘 내는 사람일 뿐이다”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냐는 질문에 변 감독은 “진심으로 저를 기억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며 “제 작품만 기억해 주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장면이나 대사, 연기를 떠올리지 ‘감독이 그 작품을 연출할 때 좋았어’라고 말하지 않는다”며 “나중에 제 작품의 장면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충분히 감사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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