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영 언니 방 오른쪽 구석에 놓여있는 선반에 마술 도구들이 널브러져 있다. 세영 언니는 마술을 좋아했다. 대학 다닐 땐 방 4면이 마술쇼 포스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무슨 데이비드인가 하는 마술사를 좋아했었는데, 하도 그 얘기를 해대서 세영 언니가 마술 얘기를 할 때마다 찬경이와 작은 소리로 잡담하곤 했었다.
언니가 마술 얘기를 하지 않기 시작한 건 대학을 졸업한 후였다. 출판사에 취업하고 바쁜 탓도 있었겠지만, 마술이 사람들과의 대화를 끌어내기에 적합하지 않은 주제라는 것을 알아챈 것 같기도 했다. 방구석에서 언니의 취향을 오랜만에 마주하니, 마음이 조금 간지러웠다. 언니는 방이 더럽다며 쑥스러워했지만, 언니의 방은 언제나 이랬다. 그냥 그녀의 얼굴이 귀여워 보일 뿐이었다.
“나 요즘 마술사가 된 것 같아.”
그때와 방은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포스터를 만지작거렸다. 선마다, 그리고 색마다 나름의 질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포스터는 레이저 포인트로 리프린트한 것이었다.
“왜?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언니는 웃으며 물었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몸을 돌려 그녀를 보니 더 그랬다. 전문가를 앞에 두고 아는 척해야 하는 슬픈 운명에 빠진 듯 말을 잃었다. 언니는 웃는 얼굴 그대로 선반으로 가 도구들을 하나씩 들었다 내렸다.
“마술은 도구 없이 못 해.”
“도구 없이 하면?”
“그건 마술이 아니잖아. 도구들은 진실을 숨겨주니까 꼭 필요해. 마술은 어떤 지점들을 숨겨서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지.”
“어떤 마술사는 그걸 정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 진짜 마법을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그래도 마술사는 마술을 하고, 그럼 속이는 거고. 근데 나는 그게 나쁜 건 아니라고 생각해.”
“... 왜?”
“인생의 모든 순간을 정면승부 할 수는 없지. 숨기는 것도 있고, 들키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그래서 마술사가 되었어, 지금. 숨기면서 연기해.”
세영 언니는 주방에서 캐모마일 찻잎을 꺼내 잔에 넣고 차를 우렸다. 투명 잔에 찻물이 우러나는 것을 지켜보며 언니 손을 잡았다. 언니 손은 차가웠다. 그래서 내 손은 뜨거웠다. 뜨거운 내 손을 뺨에 갖다 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