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태어난 것만 같던 우리 아이가 벌써 돌이 됐다. 손자를 보여드리기 위해 3년만에 부모님을 뵈러 고향에 갈 예정이다. 그런데 한 한국계 항공사 사이트에서 예매를 하다 뜻밖의 장벽을 만났다. “유아와 동반 성인의 전체 성, 이름의 합이 31자를 초과하는 경우, 31자 내로 입력해 주시고...”라는 오류 메시지가 뜨며 예약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다행히 아내의 이름이 한국 평균 길이여서 보호자로 표를 끊을 수 있었지만, 만약 아내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그 항공사를 이용할 수조차 없었다.우리 아이는 엄마의 성을 따르는데, 그 결
영국 정부는 2018년 ‘외로움’을 다루는 부서를 신설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로 따지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 장관을 겸직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에게 뜬금없어 보이던 ‘외로움부’의 설립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전혀 이상하지 않다. 브렉시트를 겪었던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외로움은 우리 사회에서도 개인의 정신 건강과 사회적 안정을 해치는 질병이 되었다. 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고립이 심화되면서 일본도 2021년 고독·고립 담당 장관을 임명했으며, 2024년 서울시는 ‘외로움 없는 서울’이
“지금 한국은 정서적 전쟁 상태야. 사회 곳곳에서 갈등과 대립이 만연하다고. 그냥 누군가 트리거만 당겨주면 돼.” 넷플릭스 드라마 (2025) 속 불법 총기 판매 조직 ‘문백’의 대사다. 트리거(trigger)는 총의 방아쇠를 뜻하면서도 방아쇠처럼 어떤 행동·감정·사건을 촉발하는 자극을 가리키기도 한다. 드라마 속 대사일 뿐일까. 우리는 매일 아침 뉴스만 들여다봐도 알 수 있다. 사람들의 감정적 도화선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분노와 폭력으로 번지고, 그 여파로 상식 밖의 사건·사고가 발생하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번 칼럼의 제목은 최근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예소연의 단편 『그 개의 혁명』에서 빌려왔다. 암에 걸린 아버지와 간병하는 딸, 그리고 유쾌한 장례식을 준비하는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으로, 예소연은 92년생으로서 이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로 기록되었다. 더구나 이미 출간된 작품이 대상을 받은 것은 47년 역사의 이상문학상에서 관행을 깨는 사건이었다. 주관사로 새롭게 나선 다산북스는 수상작 해설을 책 마지막에 배치하고 수상자와 심사위원의 대담을 먼저 실었다. 이는 새로운 독자층을 겨냥한 파격적 운영 방식이자 출판계의 변화
지난 한 달 옛 광주적십자병원은 전시 “멈춘 공간의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통해 시민들에게 개방되었다. 11년 만이었다. 병원 응급실 병상에 놓인 텔레비전에서는 1980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5·18 당시 전남도청과 인접한 옛 광주적십자병원에는 부상당한 사람들이 쇄도했고, 의료진들은 밤낮 가리지 않고 시민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분투했다. 본관 뒤편 영안실과 마당에는 여러 구의 시신이 임시로 안치되었다. 피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헌혈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병원을 찾았다.2020년
역사가 단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는 점은 5월이 되면 명확해진다. 5·18민주화운동(5·18)과 관련된 수많은 논쟁이 불거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기념 의례에 대통령이 참석하는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 참가자 전원이 부르는) 제창할지 아니면 (무대에 선 합창단만 부르는) 합창할지 등 매년 5월 18일에는 애도와 기념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게 만드는 쟁점이 주목받는다. 45년의 기간 동안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둘러싼 기억은 변화를 겪었다. 80년대 5·18은 폭동으로 인식되었지만 87년 민주화 이후 5·18은 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윤석열 전 대통령의 탄핵심판 결정문의 결론 첫 문장을 연 헌법 제1조 1항. 간결하고 단호한 이 문장으로 헌법재판소는 분명한 좌표를 제시했다. 헌재는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비롯한 행위가 헌법 질서를 중대하게 위반했다고 판단했고, 대한민국 역사상 두 번째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관 8명 전원이 탄핵소추 사유로 제시된 다섯 가지 위헌·위법 행위를 모두 인정한, 이례적이고도 명확한 헌법적 판결이었다.헌재의 ‘윤석열 파면’ 선고와 함께, 이번 판결문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대통령 파면에
필자는 요즘 바쁘게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며 산다. 작년 10월부터 아빠가 된 필자는 두달 뒤 근로계약이 만료되어 평일에는 온전히 아이를 돌보는 전업주부이자 전업아빠로 살고 있다.주부를 표현하는 각 나라의 용어는 참 재미있다. 네덜란드어는 성별에 따라 주부가 여자이면 huisvrouw(집+여자), 남자이면 huisman(집+남자)라고 한다. 영어 표현에는 stay-at-home mom 혹은 dad라는 재미있는 표현도 있다. 스웨덴은 복지국가답게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아빠들이 많은데 흔히 다른 아빠들과 함께 카페에서 라떼를 마시는
얼마 전 ‘청년 고독사 예방사업’ 안내문을 받았다. 혼자 죽을까 걱정까지 해주는 정부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고독사는 2023년 ‘고독사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정도로 심각한 사회 문제로 인식된다.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사회현상으로 고독사가 소개된 이후, 200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보도되었다. 이때 고독사는 1인 가구 증가, 고령화 심화, 개인주의 확산 속에서 예방되어야 하는 문제였다. 예방적 접근을 넘어서, 고독사는 사회적 관계 단절이나 외로움과 별개로 개념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죽음에 대한 한국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기사를 읽고 몇 분 동안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한국은 유사이래 최고의 문화적 전성기를 맞이한 듯하다. 오래전 일본의 대중문화가 서구권에서 큰 유행을 일으킨 것처럼 K콘텐츠 열풍도 한때 흥하고 마는 유행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한국의 문화 콘텐츠가 단순히 소비적 차원의 상품으로만 취급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희소하고 세계인의 마음을 끌어당길 수 있는 고유한 문화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실감하게 했다.최근 들어 한국이 세계 무대에서 입지
내년부터 학교 수업에 디지털 교과서가 도입된다. 빠르게 변하는 미디어 환경에 발맞춰 교육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온 정책이다. 새로운 교육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다. 새로운 방식에 대한 검증 없이 졸속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반대의 핵심이다. 그런데 논쟁 양상을 보면 근본적인 반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새로운 기술에 대한 우려와 거부감이다.몇 년 전부터 리터러시와 관련된 논의가 많아졌다. 논의의 중심에는 Z세대의 문해력이 과거에 비해 떨어졌다는 생각이 있다. 이 관점에서 디지털 기술은 문해력 하락의 주요 원인이다.전통
지난 6월 ‘36주 태아 낙태 사건’을 들었을 때 “국회가 숙제를 안 하면 사람이 죽는구나” 싶었다.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의 문구에 국회가 낙태를 너무 광범위하게 범죄로 만들었다고 비판하며 “2020년 12월 31일 이전에 개선 입법을” 할 것을 ‘숙제’로 주문했다. 기한 내 개선 입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낙태죄에 관한 조항은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상실한다”고 경고하였다. 결국 국회는 이 조별 과제를 제출하지 않았다.그로 인해 올해 6월 한 태아가 태어나지 못하였다.
한국에서 태어난 다문화 청소년과 달리 중도입국 청소년은 이주 배경을 가지고 한국에서 거주하는 이들을 말한다. 한국으로 이주한 후 이들은 가장 먼저 새로운 가족의 구성원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새 문화권의 언어를 습득하게 된다.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청소년 시기에 경험하는 가족과 사회의 변화는 개인의 정체성 형성은 물론 인지 발달 및 인성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중도입국 청소년들은 한국에서 그런 특별한 시기를 경험하는 경우이고 특히 교육 수준 및 한국어 수용 능력 면에서 더 복잡하고 다양한 그룹이다.그동안 중도입국 청소년을 대
학교에 머물러 있은 지도 벌써 햇수로 17년이 지났다. 대학원에 입학하고 박사과정까지 진학해버리는 바람에 학교가 집이고, 집이 곧 학교가 되어버린 생활이 10년이 넘게 이어지고 있다. 연구계획서를 작성하거나 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대학원생인 나의 일상에 직장인들의 주말이나 공휴일처럼 빨간날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닌 터라 거의 매일 같이 학교에 출근 같은 등교를 하고 있다.하루의 시간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는 터라 교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경우가 여러 번 있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건들 몇 가지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진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전체 유권자의 67%가 참여해 30년 사이에 있었던 선거 중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다. 여당은 전체 300석 중 108석을 얻어 참패했다. 의석수만 놓고 보면 야권이 압승한 선거였기에 결과에 대한 반응을 보면 갸우뚱하게 된다. 야당 지지자들은 압승했지만 진 것 같은 반응을 보였고, 여당 지지자들은 참패했는데도 안도했다. 야당 지지자들은 자신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과대평가했고 반대로 여당은 과소평가했다. 두 진영 모두 자기 세계에 갇혀 나름의 해석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여느
2009년 방영된 김연아 선수의 다큐멘터리를 본 적 있다. 김연아 선수가 정상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으며, 해외 유명 선수들의 입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인정을 받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대부분 스포츠 스타의 다큐멘터리는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엄청난 강도의 훈련과 부모님의 희생으로 어려운 가정환경, 신체적 약점, 열악한 훈련 환경을 딛고 정상에 오르는 각본을 따른다.2023년 공개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도 마찬가지다. 도 전형적인 각본에 따라 영국의 스포츠 스타
세계인권선언 제19조는 “모든 사람은 의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하며, 이 권리는 주로 자기 의견과 사상과 정보를 전달할 권리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권리는 언어적 표현뿐만 아니라 춤과 그림 등 다양한 형태의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그렇다면 감정 표현도 이에 포함될까? 확실한 답을 주지는 못하겠지만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회가 자유롭지 않아 보이는 건 사실이다. SF 시리즈 의 ‘벌컨’에서는 이성을 유지하기 위해 감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벌컨은 사실상 군사독재이고, 벌컨인들이 자기
2022년까지 베트남 이민자 커뮤니티는 두 번째로 큰 한국의 외국인 이민자 커뮤니티가 되었다. 베트남인은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의 약 10.5%를 차지하고, 베트남 여성은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인 가운데 중국(35%)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23%) 수를 차지한다(e-나라지표, 결혼이민자 현황 2022). 베트남 사회에서의 돌봄 및 가사 노동 변화 추이를 지속적으로 주목함은 한국-베트남 다문화 가정을 더 건강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하다고 본다.오랫동안 유교의 영향을 받기도 한 베트남은 1975년 내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주의를 선택했
공간은 사람을 보여준다. 만약 어떤 공간이 특정 대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면, 그 공간은 특정 대상에 대한 공간을 만든 사람의 시각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행복주택은 정부가 청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 일정 소득수준 기준을 충족한 무주택자에게 공급되는 공공임대주택과 달리 행복주택은 대학생, 사회초년생을 비롯한 청년, 신혼부부 등과 같은 특정 대상에게 공급되기 때문이다.2023년 입주 자격이 완화되지 않은 광주광역시 행복주택 공고에서 대학생, 청년을 대상으로 공급된 행복주택은 주로 16형~26형이다. 4평에서 8평
며칠 전 전남대학이 ‘글로컬대학30’(글로컬 사업) 사업에 탈락했다는 소식을 인터넷 뉴스로 접했다. 기사를 확인한 지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를 비롯한 대학원생들이 모여있는 단톡방은 탈락 이야기로 술렁였다. 보수 정권의 지역대학 길들이기라든지, 학과나 학교 간의 통폐합을 추진하는 대학들만 합격시켰다는 각자의 추측들이 오갔다. 물론 국책사업하나로 운명이 결정될 만큼 전남대학의 입지가 부실한 것은 아니다. ‘국가거점국립대학이’라는 위치는 적어도 폐교는 걱정해도 되지 않을 만큼 안정감을 주고 있다. 진짜 위기에 처한 대학은 지역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