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두율 교수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가끔은 송두율 교수가 독일 어느 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모습, 돌아오지 못하는 곳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담아내기 위해서 고민하고 있는 모습을 머리속으로 그려보기도 한다.

2년전 이맘때쯤, 나는 "우리대학에서 송두율 초청강연을 추진하겠다"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운 총학생회 후보를 위해 온몸(?)바쳐 선거운동도 해봤다. 송두율 교수가 이 땅의 대학생들과 세상사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 놓은 몇권의 책들을 읽으면서, 그를 만나면 꼭 하고 싶은 질문 몇가지를 적어놓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있다. 얼마전 "인천공항에서 입국이 거부되더라도, 한국땅을 한번 밟아보겠다는 심정으로 비행기 표를 예매하려고 했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참 마음이 착찹했다. 송두율 교수를 ’북한 공작원’으로 몰아가는 국정원과 조중동과 같은 언론매체의 맹활약으로 인해, 그의 한국행은 아직도 요원하기만 하다.

■경계인의 사색(송두율/한겨레출판사/2002)

책머리에서 그는 이 말부터 했다. "개인사는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무게를 담게 마련이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는 말일지 모른다. "잃어버린 10년." 80년대 학번들은 자신들의 대학시절을 이렇게 불렀다. 시대의 무게가 청춘의 삶을 고뇌와 번민의 시간속으로 자신들을 이끌어 갔다고... 웃어야 할 시기에 눈물흘려야 했고, 사랑해야 할 시기에 분노해야 했다고. 그들에게 있어 80년대는 이미 과거형이다.

하지만 송두율 교수는 30여년이 넘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싸움의 주체도 대상도 없이, 자신과의 싸움이 진행중인 그에게 ’경계인’이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 선 하나 그어놓고, 편가르기를 좋아하는 우리들 삶속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덜렁 경계선에 놓여진 이를 향해 보내지는 질타와 야유. 송두율 교수는 남과 북의 경계인이다.

얼마 전 우리대학에서 강연한 바 있는 찰스 테일러는 한 동안 ’공동체주의-자유주의’논쟁에서 자신이 ’공동체주의자=전체주의자’로 사람들에게 인식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논쟁의 큰 바탕이 ’우리가 사는 사회(국가)는 어떠해야 하는지, 사회에서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지’에 관한 다소 가치도덕적인 것이었지만, 과거 주변에서 바라보는 이들은 ’공동체주의vs자유주의’둘 중 하나로 쉽게 단정하려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어쩌면 송두율 교수를 경계인으로 몰아가는 우리사회의 시선 또한 비슷한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역사는 끝났다"며 미국식 생활양식을 "탈역사적 시대의 순수한 양식"으로, 미국을 "영원한 현재"라며 추켜 세운 코제브와 후쿠야마. 송두율 교수는 자본주의와 ’자유의 왕국’을 살아가는 역사의 끝 지점에 도달했다는 이들의 주장에 "역사는 끝났는가(당대/1995)"를 되묻는다.

또한 이 ’역사’의 의미가 지금 우리에게는 어떻게 다가오는지 송두율 교수는 계속 물어온다. 우리에게 있어 ’역사’는 끝났는가? 지금 이순간, 시대와 역사의 무게에 눌린 "잃어버린 10년"이 과거형으로 변해버린 우리사회속에서 더 이상 ’역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송두율 교수에게 지워진 ’역사의 무게’는 오늘도 계속된다. 그리고 자신이 느끼는 무게에 대해서 묵직한 외침을 보낸다.

"계몽은 오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결단력과 용기가 부족해서 발생하는 미성숙에서 빠져나오는 첫걸음"이라는 칸트의 지적을 인용하며, "나는 우리 모두 숙명적으로 걸머진 민족통일이라는 과제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비겁함과 게으름을 극복하는 ’계몽’을 이야기하고 싶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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