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사인 시인 수업 들은 후, 시와 사랑에 빠져
시는 논리·비논리 너머의 세계
시 <나귀쇠가 내 사랑을 지고 걸어간다> 낭독 추천
쓰기는 진실을 찾아 헤매는, 희열 있는 과정
<전대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이 시대 여성작가를 만나다’ 기획을 이어간다. 두 번째 여성작가는 올해 등단 20주년을 맞은 박연준 시인이다. △시 △산문 △소설 △동화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글쓰기를 하는 그는 지난 2004년 시 <얼음을 주세요>로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박 시인의 작품으로는 △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산문집 <소란> △<모월모일> △장편소설 <여름과 루비> △고전 리뷰집 <듣는 사람> 등이 있다. 지난 4월 15일에는 2019년에 펴낸 시집 <밤, 비, 뱀> 이후 5년 만에 5번째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을 출간했다. 지난달 26일 파주출판단지의 ‘아이스타일카페’에서 시인을 만났다.
작은 이야기에서 보편성·공감 끌어내
“문학은 작은 순간들, 작은 사람들이 작은 마음을 쓰는 모습들을 담으며 커다래진다. 작게 나뉘어 있는 개인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쓴 이야기는 보편성을 갖고, 공감을 끌어낸다. 큰 이야기를 하려면 작은 것들을 오래 바라봐야 하는 것 같다.”
‘작은’이라는 형용사는 박 시인의 작품들 곳곳에서 모습을 보인다. 작은 것에서 큰 이야기가 나오고, 보편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그는 작품을 쓸 때 작은 이야기에 집중한다. 그러나 작은 이야기는 그곳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를 읽고, 소설을 읽는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며 점차 커다래진다.
박 시인은 “큰 소리를 내고, 대표로서 공식적인 발언을 하고, 어떤 위치에 오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항상 크게 울려 퍼지고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다”며 “반면 어떤 존재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대로 봐 주지 않으면 그냥 흘려보내게 되는 순간들이 많다”고 말했다. 박 시인의 신간인 시집 속 시들은 작은 존재를 골똘히 보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을 담고 있다. 시집에는 앞서 말한 ‘작은’이라는 형용사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시집 속 <작은 인간>이라는 시를 제목으로 고민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시 쓰면 해방되는 기분 느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는 것.” 박 시인은 시를 이렇게 설명한다. 시는 누군가의 이해를 위한 글도 아니며 방식을 도식화할 수 없는 글쓰기다. 박 시인은 “산문을 쓸 때는 독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하며 독자를 많이 염두에 둔다”며 “시를 쓸 때는 쓰는 자신이나 읽는 독자가 아니라 그저 ‘태어나는 시’ 자체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대학교 3학년 ‘열병’을 앓듯 급격하게 시에 빠졌다는 박 시인은 그 시작이 15살 때의 시 공책이라고 말한다. 중학생이던 15살의 그는 혼자 시를 쓰고, 쓴 것을 공책에 정갈한 글씨로 다시 적었다. 박 시인은 “쓸 때의 기분과 쓰인 것을 모아놓은 공책의 소중함, 그게 내 문학의 시초였다”며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좋아하게 됐다”고 말했다. 시인이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글쓰기를 계속, 전문적으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문예창작과에 입학한 그는 스스로 시보다 소설을 더 잘 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학교 3학년 김사인 시인의 수업을 들은 박 시인은 시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김사인 선생님이 시 선생님이셨는데 수업을 듣고 시를 좋아하게 됐다”며 “이후 거의 매일 시를 썼던 것 같다”고 말했다. 고단한 소설 쓰기와 다르게 시 쓰기는 ‘즐거움’이었다. 박 시인은 “슬픈 이야기를 쓸 때조차 쾌감이 있었고, 해방되는 기분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후 2~3년간 몰입해서 시를 쓴 그는 자연스레 시로 먼저 등단했다.
시는 그의 성격이 가장 많이 드러나는 장르이기도 하다. 시인은 “시는 내가 쓰는 거의 모든 글에 조금씩 배어난다”고 말했다.
쓰기는 자기 자신 믿고, 설득하는 과정
“한 가닥의 진실을 찾기 위한 헤맴.” 박 시인에게 쓰기는 헤매는 과정이다. 헤맨다는 것은 쉽지도, 즐겁지도 않다. 고단한 일이다. 그는 “너무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을 때도, 게으름 피울 때도 있지만 헤매는 과정에 희열이 있다”며 “그게 좋아서 자꾸 쓰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정답을 찾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뜨거운 무언가를 한 번 쥐어본 그 감각이 좋아서 계속한다”며 “문학은 답이 없는 일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뜨거운 ‘희열’을 손에 쥔다는 것은 쉽지 않다. 시간은 계속해서 흐르고, 무언가는 사라지기도 한다. 흘러가는 것을 간신히 낚아채 손에 쥐고, 그릇에 담는 것이 박 시인의 ‘기록’이다. 그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까스로 낚아채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상태로 두는 것이 기록”이라고 말했다.
쓰기는 시인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는 “쓰기 시작했는데 이야기를 찾지 못하거나 끝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혹은 잘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와 두려움이 늘 있다”며 “항상 스스로를 설득하고 믿어야 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나아가는 길을 믿지 않으면 쓸 수 없게 된다. 박 시인은 스스로 써낸 책을 통해 자신을 믿고 계속 써나간다. 그는 “항상 더듬더듬 애를 쓰며 글을 쓴다”며 “쉽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그는 “삶과 글쓰기는 늘 함께 간다”며 “스스로 삶을 꾸리는 모습이 계속 글에 반영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다.
낭독했을 때 드러나는 시의 형상
지난 10년간 산문을 주로 써온 그는 “산문에 굉장히 신나 있어서 정신없이 썼었다”며 “시는 잠깐 멈춰서 생각을 정리할 때 은신처와 같은 장소였다”고 말했다. 지난 4월 출간된 시집 <사랑이 죽었는지 가서 보고 오렴>은 박 시인이 5년간 혼자 누구에게도 보일 생각 없이 스스로 즐겁고자 쓴 시들이 담겼다.
박 시인은 “시는 논리, 비논리의 세계가 아니라 그 모든 것 너머의 세계로 굉장히 자유롭다”고 말했다. 시집 속 시들은 ‘낭독’의 방식을 통해 영혼을 갖는다. 박 시인은 “시는 소리가 되고자 하는 장르”라고 말했다. 시가 어렵거나 잘 이해되지 않을 때 소리내 시를 읽으면 시의 얼굴이 드러난다. 시도 소리로 발화되면 그 형상이 드러나는 것이다.
시인은 낭독했을 때 좋은 시로 <울 때 나는 동물 소리>와 <나귀쇠가 내 사랑을 지고 걸어간다>를 꼽았다. 그는 “첫 번째 시는 정말 낭독을 위한 시였다”며 “두 번째 시는 ‘나귀’를 부르며 시가 시작하는데 그 호소하는 톤을 계속 생각했다”고 말했다. 시인은 음악과 시의 연결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는 “시인의 음악성을 중요시한다”며 “음악에는 호흡, 음률, 작곡하는 사람의 시선, 가치관 등이 담기기 때문에 시에 있어서 음악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세상에 올 때, 당신은 무엇을 가지고 왔나요?” 이 질문을 늘 생각한다는 그는 “노래하는 영혼을 가져온 것 같다”며 “그 영혼이 같이 태어나서 시도 쓰고, 다른 이야기도 쓰는 것 같다”고 말했다.
5월 말 초여름 파주에서 박연준 시인은 그가 좋아하는 작은 것, 이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4월에 어린잎이 나오고, 작은 잎이 점차 짙어지고, 여름에 완전히 무르익어 진한 녹색을 띨 때 그는 나무에게서 어떤 짐승 같은 성장을 본다. 박연준의 쓰기도 비슷하다. 그의 이야기는 더듬더듬 작은 곳에서부터 애쓰며 커다래진다. 한여름에 짙은 녹색을 띠게 되는 초여름의 이파리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