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계엄당국, 713호 소각
기사 검열·기자 해임까지
박정희 정권, 시위 참여 대학생에 정학·연행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이 선포한 계엄은 1980년 광주의 공포를 떠오르게 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들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라며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어 박안수 계엄사령관은 △국회·의회·정당 활동과 정치적 결사 등 정치활동 금지 △모든 언론과 출판 계엄사 통제 △사회혼란 조장하는 파업·태업·집회행위 금지 등의 내용을 담은 포고령 1호를 선포했다.

계엄은 군대를 이용해 국가 행정·사법 분야를 통치하는 것으로 △전쟁 등 국가비상사태 △ 행정·사법 기능 수행이 곤란한 상황 △군사 작전이나 질서 유지가 필요한 상황에 내려질 수 있다. 포고령은 계엄령 아래서 계엄사령관이 내리는 명령이다.

1948년 제주 4·3 사건 이후 내려진 역사상 10번째 계엄. 역사 속 광주와 전남대는 계엄에 맞서 투쟁했고, <전대신문>은 감시와 억압 아래 진실을 기록하려 노력했다. <전대신문> 기사를 통해 역대 계엄 역사를 짚어본다.

 

4·19혁명 데모 알린 <전대신문>

1960년 5월 20일 발행된  70호 사진보도. 사진에는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과 대치한 시위군중의 모습이 보인다.
1960년 5월 20일 발행된 70호 사진보도. 사진에는 바리케이트를 사이에 두고 군과 대치한 시위군중의 모습이 보인다.

1954년 <전대신문> 창간 이후 처음 발생한 계엄은 4·19혁명 때였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부의 부정선거 사실이 밝혀지자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시작됐다. 우리 대학 학생들을 포함한 광주시민은 광주고등학교에서부터 시위를 진행했다. 이에 이승만 정권은 광주를 포함한 전국 주요 도시에 계엄령을 내렸지만 시위 진압에 실패해 하야했다. 이후 발행된 <70호(1960.5.20.)>는 “우리는 그들의 몸부림을 잊어서는 안 되겠고, 민주제단에 뿌린 그들의 샛빨간 피와 푸른 꿈과 아낌없이 버린 젊음을 헛되게 해선 안 되겠다”는 내용의 사진보도를 실었다. ‘4월 혁명의 의의, 위대한 4·19 혁명’ 사설에서는 “4·19혁명은 시민혁명이며 정신혁명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5·16군사정변과 언론 탄압

1964년 6월 19일 발행된  188호 3면의 기사 '데모 물결은 잠잠해지고'.
1964년 6월 19일 발행된 188호 3면의 기사 '데모 물결은 잠잠해지고'.

다음 계엄은 1961년 5·16군사정변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고 정국이 혼란을 겪자 제2군 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는 군사정변을 일으켰다. 군사정변에 성공하자 박정희 정권은 곧바로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에 대학과 대학 신문들은 통제와 검열의 대상이 됐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시도하고 일본과 조약을 맺으려 하자 전국의 대학생들이 반대 시위를 진행했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배상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6·3항쟁으로 불리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자 박정희 정권은 다시 계엄령을 선포하고 감시를 강화했다. ‘데모 참가 학생 24명에 정학 처분’<188호(1964.6.19.)>, ‘학내 정치활동 엄금’<189호(1964.8.14.)> 등 기사에서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이 압박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데모의 물결은 잠잠해지고’<188호(1964.6.19.)> 기사의 “광주의 데모는 경찰과 학생 백여명이 부상을 입고 3백여명이 연행, 8명이 구속되는 불상사를 빚어냈다”에서 부상자와 구속자도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회 문제 해결에 힘 보태는 것이 학생기자 의무”

1968년부터 3년간 <전대신문>(당시 <전남대학보>) 기자로 활동한 송정민 신문방송학과 명예교수는 “국가의 압박으로 사회 문제에 대학생들이 나서기 어려워 학생운동단체와 학보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시위들 옆에 학생기자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고민하고 힘 보태는 것을 기자의 의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책 <전대신문 70년 역사>에 따르면 70년대 <전대신문> 기자들은 압박 속에서도 학내외 문제들을 비판하고 지면에 싣고자 했다. 그러나 학내 군사훈련 등 학생들에게 직접 관련되는 문제들에 의견을 구하면 ‘그대들이나 잘하세요’ ‘학생 기자들 너희들이 도대체 뭔데?’라는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고 한다.

 

유신헌법 제정과 발행 중단

1969년 박정희 정권이 국가 안보 의식 강화를 위해 교내 군사훈련(교련) 수업을 대학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자 학생들은 다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련 수강 거부’<412호(1971.4.22.)> 기사에 따르면, 우리 대학 학생들은 ‘교련 문제에 대해 당국과 토론할 수 있는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라’ ‘교련 철폐와 학원 자유화를 위해 투쟁을 계속하고, 앞으로 교련 수강을 거부하기로 결의했다’고 성토대회를 열었다. 또한 “신성한 학교에 군화발이 웬 말이냐” “신문아 눈을 떠라, 방송아 입을 열라”라고 외쳤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을 노리는 헌법 개정을 위해 다시 한번 계엄령과 특별선언을 발포했다. 특별선언은 국회 해산과 정당·정치활동의 중지, 헌법 효력 정지 등의 내용을 담았다. 광주에서는 우리 대학을 중심으로 ‘유신헌법 반대 시위’가 시작됐다. 학생들은 학내에서 집회를 열고 유인물을 배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정부는 시위를 강제 해산하고 학생들을 체포했다. 이때 <전대신문>은 10월 13일부터 12월 16일까지 발행이 중단됐었다.

 

계엄군이 신문 소각·기자 해임까지

계엄당국 압박을 받은 학교가 소각한  713호의 1면 사진. 제목은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함성'이다.
계엄당국 압박을 받은 학교가 소각한 713호의 1면 사진. 제목은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함성'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세력이 군 권력을 장악하고 계엄령을 내리자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했다. ‘민주화 추진 위한 강령 채택’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712호(1980.5.8.)>에서 우리 대학과 조선대 학생들이 ‘개헌 거부’ ‘휴교령 거부’ 등의 내용을 담은 시국선언을 발표했음을 알 수 있다.

‘광장에 메아리친 민주함성’<713호(1980.5.15.)>에서는 5월 14일 교수·학생 1만명이 도청 앞 광장에서 연 시국 성토 집회를 다뤘다. 시민들이 정부를 향해 계엄 해제를 요구하는 등의 내용이다. 그러나 이 신문은 계엄당국의 압박을 받은 학교에 의해 모두 소각됐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전두환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해 모든 민주화 운동에 압력을 가했다. 동시에 우리 대학을 포함한 전국 모든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다음날인 5월 18일 우리 대학 학생들과 광주시민은 우리 대학 정문에 집결해 시위를 시작했다.

파병된 계엄군은 시위대와 일반 시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무차별 연행했다. 광주·전남 시민군들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맞섰다. 2024년 5·18민주화운동(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따르면 5·18 희생자는 △사망 166명 이상 △행방불명 179명 △부상 2,617명 등이다.

5·18 이후에도 전두환 정부의 탄압은 계속됐다. 8월 계엄당국은 수습기자를 제외한 모든 기자를 해임했고, <전대신문>은 9월까지 발행 중단됐다. 이후 9월 11일 발행을 재개했지만, 국가 압력 아래 기사 내용을 검열 받았다. <전대신문 70년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전대신문>의 ‘죽음’이라고 말한다. 현실을 기사로 쓰지 못 하는 무거운 침묵 아래 내부 갈등이 극에 달했고, 기자 사퇴와 제작 거부 투쟁으로도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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